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고종석의 글과 책]/윤성근 마포 시편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고종석의 글과 책]/윤성근 마포 시편

입력
2002.09.25 00:00
0 0

'황해문화' 가을호에 윤성근씨의 시 세 편이 실려 있다. '마포 일기'라는 제목의 연작시다. 기자의 눈길이 이 시편들에 가 닿은 것은 제목 때문이었다. 기자에게 마포는 유년의 공간이다. 1960년대의 마포를 더듬어 볼 때 대뜸 떠오르는 것은 가난의 이미지다. 좁다랗고 구불구불한 골목길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허름한 출입문들은 그 문 안쪽에서 먹고 자고 사랑하고 싸우는 사람들의 볼품없는 일상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그때로서는 호사스러웠던 마포 아파트가 어느 순간 지표 위로 솟아올랐을 때, 둘레의 가난은 더 적나라해보였다.한 세대 동안 서울의 모든 곳이 변했듯, 마포도 변했다. 윤성근씨의 시에서 마포는 '이 거대 도시의 심부'('마포 일기 1')다. 화자는 마포를 오가거나 생각하며 일상에 지친 도시인의 메마른 내면을 우울하게 펼쳐놓는다. 그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권태, 무기력, 피로감, 어중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집 떠나/ 이 도시로 온 이후/ 길 잃고 털 빠진 발목으로 비통한 꿈의 볼모가 되어갈 때/ 그 사이 새치가 아닌 흰머리에 씌어진 경구는/ 더 많이 길을 잃어야 한다는 것"('마포 일기 3')이라는 절망적 푸념은 "내가 죽음이든 허무이든 혹은 추상적인 말이든/ 이 삶을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하리란 것은/ 자명해 보인다"('마포 일기 2')라는 자포자기의 귀결이다.

'마포 일기 1'에서는 그 메마름이 자학에 가깝다. 화자는 자신이 욕망과 본능에 충실할 뿐, 이 도시의 심부에서 일어나는 일엔 무관심하다고 말한다. "단지 단순하게 살아가려고/ 거리이동하면서, 살아가는 문제들 같은 건/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어요/ 허공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 사내들과/ 그 유리창에 찍 정액을 뿌리는 또 다른 사내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는 없어요."

화자는 말하자면 자신이 마르쿠제가 발설한 바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문화 가치와 기성 질서를 무자비하게 동일화하는 이 거대 도시에서 그는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이성의 힘을 잃었다. 말하자면 그는 소외된 인간이다. '거리이동하면서'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그것은 물론 거리를 오간다는 뜻이겠지만, 어찌 보면 '세상과 밀착하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면서', '아무와도 연대하지 않으면서'라는 뜻으로도 읽힌다. 화자는 세상의 비참(유리창을 닦는 사내들)에도 비천(그 유리창에 정액을 뿌리는 사내들)에도 부러 무심한 채 어중간한 자세로 있다.

그러나 화자가 이어 "그럴 때마다 열패감 속에 아파오는 가슴 속/ 하지만 그것조차 어느 부위에 만져지기나 하는 것인지/ 오, 이것은 나의 한계/ 빌어먹을 나의 기호!"라고 투덜거릴 때 그는, 비록 명료하지는 않을지라도, 자동화한 의식의 각질을 깰 반성적 내면을 아직 간직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셈이다. 자신의 무감각을 직시하는 사람에게는 감각의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이미 열려 있게 마련이니.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