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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 불법체류 자진신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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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와 현장 / 불법체류 자진신고제

입력
2002.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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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전8시 서울 영동포구 문래동 출입국관리사무소 불법체류신고센터 앞. 새벽 부터 재중동포, 중국인, 필리핀인, 러시아인 등 수백명이 비행기표와 배표, 여권 등을 손에 쥔 채 몰려 들었다.중국 훈춘(琿春)행 배표를 들고 있던 재중동포 김모(45ㆍ여)씨는 “내년에 가냐고요. 한국에 들어오느라 진 빚의 절반도 못 갚았는데, 5년 정도 더 머무를 거예요”라고 잘라 말했다.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가 근무지를 이탈, 불법체류자가 된 필리핀인 P(29)씨는 “돈이 모이는 것을 보고 결정할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월드컵을 앞두고 불법체류자에게 1년간의 합법체류와 자진출국 기회를 주기 위해 지난 3월25일부터 오는 25일까지 실시하는 ‘불법체류외국인 자진신고제’의 실효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당국은 불법체류자의 출국의사 확인을 위해 신고시 출국일자가 적힌 비행기표나 배표를 구비토록하고 있으나 신고자 대부분은 출국할 뜻은 아예 없이 이를 합법체류를 위한 보험용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국은 꿈도 안꿔요’

8일까지 국내 불법체류자 26만 여 명 중 13만5,000여명이 신고했으며, 당국은 마감일까지 총 신고자가 20만명을 넘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하지만 여행업계와 외국인노동단체 관계자들의 전망은 사뭇 다르다. 이들은 신고자 상당수는 허수”라며 “실제 출국하는 사람은 몇 명 안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 동대문구의 한 정육점에서 일하고 있다는 재중동포 이모(35ㆍ여)씨는 “뱃삯 16만원이나 항공료 20만원을 투자하고 합법적 신분을 얻는 게 어디냐”며 “1년 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기 위해 신고하러 왔다”고 털어 놓았다.

이씨는 “신고하러 온 동포 대부분이 같은 생각”이라고 귀띔했다. 여행업계 관계자도 “여행업체야 돈을 벌어 좋지만 배표 예약자 대부분은 신고한 출국 날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11만~16만원에 달하는 중국, 러시아 행 배표 중 합법 체류할 수 있는 마지막 달인 내년 3월분 배표는 거의 예약이 완료된 상태. 비싼 항공료를 지불해야 하는 필리핀, 방글라데시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60~70만원에 달하는 항공권을 구입, 신고한 후 브로커에게 수수료 15만~20만원을 내고 되파는 실정이다.

▼'신고해도 불법취업자’

이날 불법체류 자진신고를 끝낸 방글라데시인 U(33)씨는 합법체류 신분을 얻었지만 기자의 말을 듣고는 곧 안색이 변했다.

“고용주와 동반 신고한 외국인이 중간에 업체를 옮기거나 고용주의 출국보장각서 없이 혼자 신고한 외국인이 취업을 하면 모두 단속 대상”이라는 설명에 U씨는 “사장님이 각서를 써 주지 않아 혼자 신고했는데 그 말이 사실이냐”고 되물었다.

U씨와 같이 불법체류 신고를 한 외국인 노동자들 대부분은 곧 바로 실업자로 전락하거나 또 다시 ‘불법취업’이라는 멍에와 당국의 단속을 피해 다녀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국인 고용주 대부분은 외국인 노동자에게 출국보장각서를 써 주지 않기 때문.

서울에서 가구공장을 운영하는 박모(53)사장은 “그 동안 외국인을 불법 고용한 사실이 드러나 이후 감독기관의 감시를 받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고, 외국인 직원들이 직장을 자주 옮기는 데 일일이 어떻게 보장각서를 써주냐”고 반문했다.

때문에 항공료가 비싼 스리랑카, 필리핀, 파키스탄인들은 신고자체를 꺼리는 형편이다. 파키스탄인 L씨는 “모아둔 돈도 없지만 혼자 신고하면 취업이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난 후 단속이 두렵지만 아예 신고를 포기했다”고 말했다.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의 박천응(朴天應) 소장은 “외국인근로자에 대한 당국의 직장 이동과 취업금지 정책은 불안정 고용 상태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의 현실을 무시한 처사”라고 질타했다.

박 소장은 “단기적으로 불법체류 신고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를 주고, 장기적으로는 고용 허가제 도입 등 근원적인 정책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기수기자

mounta@hk.co.kr

■"우린 쫓겨나도 나머지 26일만 남을수 있다면…"

저희 2명이 강제 추방을 당하더라도 나머지 26만여명이 한국에 무사히 남을 수만 있다면….” 고향친구이자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인 방글라데시인 꼬빌(29)과 비듀(28)씨는 지난 달 28일 먼지가 뿌연 가구 공장을 함께 박차고 나왔다.

대신 차가운 명동성당 바닥에 텐트를 치고 ▦ 집회 결사의 자유 보장 ▦ 외국인 노동자 추방반대 ▦ 노동비자 쟁취 등을 주장하며 9일로 12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국체류 10년째인 꼬빌, 4년째인 비듀씨는 당장 이번 달부터 가족들에게 보낼 돈이 바닥났지만 “이미 십자가를 질 준비가 돼 있고 가족들도 이해하고 있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이들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단체인 민주노총 산하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 회원들. 이곳에서 만난 외국인들이 법무부의 불법체류자 자신 신고제도에 대해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어 농성에 앞장 서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들은 “말만 자진신고 일뿐 사실은 1년 안에 한국을 떠나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꼬빌씨는 “외국인 친구들이 하루 수십 차례씩 전화를 걸어 ‘힘내라. 쉽게 나설 수 없는 내 몫까지 해내라’고 격려를 보낸다”며 “누군가 돕고 있다는 생각에 하나도 힘들지 않다”고 말했다.

이들에게는 한국 정부의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반대하는 국제적인 연대가 형성돼 3,6,7일 캐나다, 호주, 방글라데시 한국대사관 앞에서 항의시위가 열린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함께 농성에 참여하고 있는 이윤주(李胤周) 평등노조 지부장은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운동의 대부 전태일에 대해 관심이 매우 높다고 전했다.

꼬빌씨는 기다렸다는 듯 “전태일은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항상 살아있다. 희생 정신이 없었다면 그가 그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이라며 입술을 꽉 물었다.

그만큼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한국에 온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정부의 불법체류자 처리 정책은 분노를 낳았고, 이에 맞서고 있는 그들의 각오도 굳어보였다.

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시민단체의 대안

고용허가제는 불법체류자 문제를 해결해 줄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992년 시작된 산업연수생 제도가 해마다 기하급수적인 불법체류자증가를 불러오면서 대만과 싱가포르 등에서 시행 중인 고용허가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급부상하고 있다.

실제로 대만과 싱가포르는 90년을 전후로 일정 기준에 따라 매년 제한된 인원의 외국인근로자 고용을 인정해주는 고용허가제를 도입, 불법체류자 비율을 30~40%에서 10% 이내로 크게 떨어뜨렸다.

조선대 법학과 최홍엽(崔弘曄) 교수는 “한국에서 외국인들은 연수생 신분으로 들어와서 실제로는 그 이상의 노동을 제공해왔다”며 “큰 틀에서 고용허가제로 이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말했다.

정부도 이미 고용허가제 도입 필요성에 공감, 제도 개선을 서두르고 있으나 현실의 벽이 워낙 두텁다.

지난 해 11월 김호식(金昊植)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법무부 산자부 노동부 등 관계부처 회의에서 ‘산업연수생 제도와 병존시키되 처음부터 근로자신분으로 들어오는 것’을 검토하기로 결정했다.

용어만 고용허가제를 쓰지 않을 뿐 사실상 산업연수생 제도와 고용허가제를 병행하기로 한 것. 이마저 6월까지 협의를 거칠 예정이나 임금인상을 우려한 중소 기업들의 거센 반발로 최종 도입까지는 진통이 예상된다.

2000년 민주당은 고용허가제 도입을 검토했다가 임금 상승 등을 우려한 중소 기업들의 반대에 부딪혀 백지화한 적도 있다.

이에 대해 박천응(朴天應)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소장은 “단순히 인건비 뿐만 아니라 불법체류자 문제를 해결하는데 드는 사회적 비용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며 “기업체가 불법 고용에 대한 벌금을 물거나 단속을 피해 공장 문을 닫는 등 장부에 잡히지 않는 비용이 엄청나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이윤주(李胤周) 평등노조 이주노동자 지부장은 “사업장 이동 자유를 제한하는 대만식 고용허가제는 불법체류자 비율만 낮출 뿐 인권유린은 오히려 심화시킬 수가 있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이씨는 대신 “사업장 이동의 자유, 노동3권이 보장되는 독일식 노동허가제는 불법체류자비율도 낮추고 외국인 인권까지 감싸는 진짜 대안”이라고 주장했다.

정원수기자

nobelia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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