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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인력시장 르포 / "웃돈 줄테니 일꾼 구해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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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인력시장 르포 / "웃돈 줄테니 일꾼 구해주오"

입력
2002.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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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일 오전 4시30분, 서울 양천구 신정동 신정네거리. 아직 짙게 깔린 어둠 사이로 편한 옷차림에 하나씩 가방을 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5시에 이르자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은 100여명을 넘어섰다.끊이지 않는 웃음소리, 동창회에 온 것처럼 반갑게 인사를 주고 받는 사람들…. 국제통화기금(IMF) 직후 얼어붙은 건설경기에 ‘하루 품 파는게 전쟁’이던 새벽 인력시장, 일당은 묻지도 않고 그저 팔려나갈 수 있기만 초조하게 기다렸던 광경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건설경기가 호황인 요즘은 공사장마다 일손이 턱없이 부족해 인력시장에는 활력이 넘친다.

이곳 신정동 인력시장은 콘크리트공, 철근공, 비계(飛階ㆍ건축공사시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임시가설물을 설치하는 일)공 등 비교적 기술을 보유한 건설 일용직 인부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 서울시내 17개 새벽 인력시장 가운데서도 비교적 규모가 크다.

◈ 임금 올라 이제는 살만

신정동 인력시장의 평균 임금은 콘크리트ㆍ철근공의 경우 일당 13만원, 고층에서 일하는 위험한 비계공이 15만원으로 IMF 이전 수준을 완전히 회복했다.

10년 이상 비계일을 해온 정인환(48)씨는 “한 때 7만~8만원까지 떨어졌다가 지금은 15만원을 받으니 ‘따블’이 된 셈”이라고 말했다.

건설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지정길(62)씨는 “3월에도 인부들의 요구에 따라 일당이 1만원씩 올랐다”며 “요즘 같아서는 일할 만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설현장 임금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6월 4만5,000원에 불과하던 건설현장 일반 잡부 임금이 최근에는 6만~6만5,000원으로 40% 가량 상승했다.

미장이나 벽돌공 등 기능공의 경우는 몸값이 더욱 비싸져 8만원 하던 일당이 9개월 만에 16만원으로 100%나 뛰었다.

“일에 치이는 상황이죠. 이곳 저곳에 빌라니, 아파트니 공사하는 곳이 좀 많습니까. 특히 최근에는 비수기가 따로 없습니다. 지난 겨울에도 용돈벌이는 충분히 됐어요. 20일만 일해도 월 300만원 아닙니까. 이제 날이 다 풀렸으니 분위기가 더 살아나겠죠.” 10대부터 건설일을 해온 이헌재(42)씨의 설명이다.

옆에 있던 정씨가 “이 친구 지금 타고 온 차가 (대우) 브로엄”이라고 한마디 거들고는 이어 “3,000만원짜리 밑으로는 여기에 차도 못댄다”고 농까지 건넨다. 얘기를 나누느라 몰랐지만 길가에는 인부를 태우기 위해 늘어선 승합차들 사이로 몇몇 중형 승용차가 세워져 있다. 상당수가 자기 차를 타고 나온다는 설명.

◈ 임금 올라도 일손은 부족

정씨가 “저 사람이 사장이니 말을 들어보라”고 지목한 사람은 일명 ‘오야지(중년의 샐러리맨을 뜻하는 일본어로 전후 일본경제를 일으켜 세운 주역이란 존경심을 담고 있다)’정일권(52)씨. 건설공사 재하청업자로, 인력시장 등을 통해 필요인력을 충원, 현장에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오늘은 열댓명을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요즘은 목표인원을 채우지 못할 때가 많아요. 어디를 가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이날 인력시장에 나온 인부들 대부분은 채 30분도 안돼 일감을 찾아 자리를 떴다. 나오자마자 즉시 팔려나가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지만 오히려 인부들이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편이다.

정일권씨는 “요즘은 미리 연락을 마치고 곧장 현장으로 가는 인부들이 절반을 넘어 새벽 인력시장에서 사람 구하기가 더욱 어렵다”고 말했다.

오전 7시. 어느새 모여있던 인부들이며 승합차들이 거의 사라졌다. 100~200명의 인부가 일감을 찾아 떠나는데 고작 1시간 30분 남짓이 걸렸다.

◈ 속타는 건설업체

건설부문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매달 전년 대비 50% 이상의 성장세를 보이면서 시중의 일용직 인력을 빨아들이고 있다.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전년대비 건설업 취업자 증가율은 마이너스 상태였으나 11월 1.9% 증가로 반전한 뒤 올 1월과 2월에는 각각 11.6%와 13.5%의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사람이 늘었지만 필요 인력을 채우지는 못한다. 건축공사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올 들어 2월 말까지 전국 주택건설실적은 모두 7만9,321가구로 전년 동기대비 133.9%나 증가했으며 특히 서울은 231.5%나 급증했다.

1월 중 건축물 착공물량도 지난해보다 120.5% 늘어났다. 때문에 일부 현장에서는 웃돈을 줘도 필요한 숙련공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운다.

서울 동부이촌동 LG아파트현장에서 인부를 관리하는 재현SI 여양구(50) 소장은 “임금이 많이 올랐지만 대형업체의 경우, 정해진 단가 때문에 이를 적극 반영하는 등의 탄력적인 대응을 하기가 어렵다”며 “그나마 자체 인력을 보유하는 있는 협력업체들과 평소 긴밀한 관계를 맺어온 곳은 나은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최근, 빌라나 다세대주택 등의 건축이 폭발적으로 증가해 인력난과 임금인상을 부추긴다”고 설명했다. 소규모 공사현장에서는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공사를 마치기 위해 임금을 올려주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곧 올해 선거일정이 본격화하면 이 같은 현장 인력난이 더 심해질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진성훈기자

bluejin@hk.co.kr

■임금 안정 위협…내수정책'부메랑'

건설부문 일용직에서 시작된 인건비 급등현상이 올들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동안 안정세를 보이던 소비자물가 마저 꿈틀거릴 조짐을 보이는가 하면, 정치일정과 맞물린 제조업 부문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도 더욱 거세지고 있다.

지난해 저금리 기조 아래 공격적인 재정집행으로 이룬 내수주도 성장정책의 후유증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 흔들리는 임금 안정구조

외환위기 이후 비교적 안정된 임금수준을 유지해 온 국내 기업들이 올들어 임금 인상 압력을 강하게 받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1998년(132만6,000원)부터 2001년(170만2,000원)까지 4년 동안 제조업 월평균 임금은 28% 상승하는데 그쳤다.

이는 같은 기간 중 명목 국내총생산(GDP) 증가율(30.6%) 보다 2% 포인트 가량 낮은 수치로, 성장률을 밑도는 낮은 임금 상승률이 외환위기 극복과 국가 경쟁력 향상에 큰 역할을 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난해 하반기 이후 일용직에서 나타난 인건비 폭등 현상이 경제 전체의 임금수준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최근 발표한 ‘1ㆍ4분기 경제전망’에서 “이미 실업률이 3%대 초반까지 하락한 가운데 경기회복에 따라 노동수요가 증가하고 있어 임금인상 요구가 확대될 전망”이라고 예상했다.

전반적인 임금인상 압력과 함께 임금구조의 양극화와 경력파괴 현상도 더욱 심화할 전망이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월평균 200만원 이상의 급여를 받는 노동자의 비율이 94년에는 5.7%에 불과했으나 지난해에는 26.6%로 늘어났다.

LG경제연구원 관계자는 “연봉제가 산업전반으로 확대되고, 전체 임금에서 능력급이 차지하는 비율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고임 노동자의 임금 상승폭이 저임 노동자를 훨씬 능가하는 현상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 가시화하는 후유증

한국개발연구원(KDI)은 “건설ㆍ서비스 부문 일용직 임금 상승이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같은 우려는 지표상으로도 확인되고 있다.

전체 소비자물가에 20%가량의 비중을 차지하는 개인서비스 물가의 경우 1월(상승률 0.19%)과 2월(0.28%)에는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으나 인건비가 폭등하면서 3월 한달 동안 2.22% 상승했다. 이에 따라 전체 물가상승률 역시 2월 0.46%에서 3월에는 0.56%로 0.1%포인트 높아졌다.

조동철(曺東徹) KDI 거시경제팀장은 일용직 임금 폭등 현상은 ‘저금리 정책→부동산 가격 상승→건설투자 증가→임금인상→물가불안’ 등으로 이어지는 인플레이션 과정의 일부분이라고 밝혔다. 그는 “임금 인상이 물가불안으로 이어지기 전에 금리를 인상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 팀장은 또 “민간의 노동수요가 확대되는 가운데 시행되는 공공근로사업은 인력부족 및 임금상승 압력을 유발한다”며 관련 사업의 축소를 촉구했다.

조철환기자

ch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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