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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극성이면 필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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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달영 칼럼] "극성이면 필패라…"

입력
2001.12.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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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주제어(主題語)의 하나인 ‘개고기’를 두고 쟁론하던 어느 TV토론에서 본 장면이다.한쪽 토론자들의 ‘애국적’이고 공격적인 논리에 맞서던 수세(守勢)의 토론자는 결국 이렇게 말을 하고 입을 닫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여하튼,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너무 극성스럽다는 겁니다!”

그 토론의 찬ㆍ반 의견에 대한 판단에 앞서, ‘우리가 극성스럽다’는 지적에는 전적인 공감대가 있다.

참으로 한심한 보신(補身) 문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80년대 한 TV드라마 주인공의 말버릇이 유행시켰던 ‘온 세상 모두가 도둑(민나 도로보)’에 이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오늘의 우리 사회는 ‘극성쟁이, 그들만의 세상’이 거의 틀림없다.

어디서나 극성을 떨지 않고서는 최소한의 생존도 얻어내기가 어려운 것이 우리 현실이기 때문이다.

어원을 따지면 극성은 본래 한자말(極盛)이다. ‘몹시 왕성함’ ‘성질이 과격함’ ‘억지세고 적극적임’ 정도의 뜻풀이를 볼 수 있다.

좋게 보면 ‘열심히 사는 모습’이지만, 뒤집으면 ‘남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나만 잘 살자는 모습’만 남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볼성 사나운 극성은 아마도 “남이하니까 나도…”일 것이다.

중국땅에는 지금 초중등 수준의 한국인 조기유학생이 기하급수로 늘고 있다고 한다.

만(萬) 단위를 넘어, 이야말로 이 시대의 한류(漢流)인데, 이같은 21세기 세계화의 선견(先見) 축에 못 끼는 부모만이 자칫 또한번 불출로 남기 마련이다.

‘좋은 유치원’부터 시작해야 ‘좋은 대학’에 가게 된다고 ‘확신’ 하는 부모들은 아이들이 영어이름으로 불리고 영어로만 생활하는 유치원에 웃돈 주고라도 보내야 한다.

영어만으로도 부족해서 일어, 중국어 까지 ‘직수입 교재’로 ‘원어민 강사’가 가르치는 ‘귀족’ 유치원도 없지 않다는 소문이다.

방학이 되면서 왕년의 농구스타가 문을 연 ‘키 크는 교실’은 지금 문전성시라고 한다.

한국인 10대후반의 남학생 95%가 포경수술을 했다는 내용의 ‘비정상적으로 높은 남한의 포경수술비율’이라는 비뇨기과 논문이 서울대학의 한 물리학 교수에 의해 발표된 것은 눈물 날만큼 포복(抱腹)할 현상이다. 우리는 유대인이었나.

북유럽국가들과 이웃 일본에서는 포경수술률이 1~2%, 또는 5% 미만이라고 한다.

“남이 하니까…” “해야 좋다고 누군가가 그러니까…” 부모들에 이끌려 무고한(?) 피부를 잘라내는 이 ‘비정상’은 “무지의 탓”이라고 조사자는 말하지만, 이 모두 너나없는 “극성 탓”이 아니고 무엇인가.

어느 해보다 ‘술독에 빠진 듯한’ 2001년의 세밑 풍경을 보면서, 독주 기준으로 세계1위의 음주량(11.9ℓ, OECD 회원국 평균의 5배)을 기록했다는 통계에 다시 놀란다.

“로얄 살류트를 맥주에 빠트려 목구멍에 털어넣고, 발렌타인 17년을 소주잔 돌리듯 퍼마시는” 천박무쌍한 음주풍속으로 미뤄서는 당연한 ‘1위’다.

무엇보다도‘권(權力)벤(벤처거품) 유착’이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핵심으로 등장한 4대 게이트의 광풍속에서, 또다시 ‘프리미엄 몇 천만원’의 묻지마 투기열풍을 불러내기도 했던 2001년이 마지막으로 저물고 있다.

그리고 이들 극성스러움의 시말(始末) 보다 몇배는 더할 극성스러움을 예비한 ‘선거의 해’ 2002년이 곧 열린다.

‘조폭’이 떴다니까 너도나도 ‘조폭’만 찾는 식의, 몇 가지 ‘낙관론’의 억지 지표만 가지고 흥청망청으로 치닫는 식의, 이 서글픈 무지와 극성은 묵은 해와 함께 버려야 할 유산이다.

지금은 온 국민이 졸부 흉내내다 쪽박찼던 4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극성이면 필패(必敗)라…”는 교훈은 어사가 된 이몽룡이 읊조렸던 사설이다.

칼럼니스트

assisi60@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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