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당 때의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우리 정치사 앞부분에서 특이하게 두드러진 인물이다. 일제 관동군 헌병오장(伍長)출신으로 광복 후 조선경비대 사관학교(육사) 3기로 임관된 것은 드문 사례가 아니다.그러나 좌우대치 정국에서 여간첩 김수임 사건등 대공수사에 발군의 역량을 발휘했고, 전쟁 중에는 부역자를 가리는 합동수사본부장에 오른 '저승사자'같은 존재였다. 특히 군내 좌익을 색출하는 숙군(肅軍)작업을 주도, 명성과 악명을 함께 떨쳤다.
■그는 특히 1949년 육군장교 안두희에게 백범 김구 암살을 지시하고, 암살범의 구명과 군 복귀 등을 돌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경력과 충성심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그가 36세이던 56년 1월 서울 원효로에서 출근길 지프를 가로막은 괴한들의 총격으로 암살된 사건은 엄청난 파문을 불렀다.
현역장성 암살이 유례 없었지만, 당시 표현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위세'를 떨친 권력 측근 암살의 배후가 비상한 관심사였던 것이다.
■사건 한달 만에 암살을 지시한 허태영 대령과 하수인인 부하 송용고, 신초식, 이유회 등이 검거됐다. 또 배후로 강문봉 육군중장이 드러났다.
허태영은 "김창룡이 용공조작을 일삼고, 군 조직을 파괴해 처단했다"고 법정에서 당당하게 증언, 일반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허태영 등 4명은 총살형에 처해졌고, 강문봉 등은 무기징역을 받았다가 4ㆍ19 뒤 특사로 풀려났다. 중장에 추서된 김창룡은 3부요인이 참석한 국군장(葬)을 거쳐 안양 야산에 안치됐다.
■뒷날 방송드라마 '정계야화'로 재조명되며 한층 유명해진 사건은 군내 파벌싸움이 실체라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김창룡의 어두운 행적과 허태영의 의기(義氣)가 엇갈리는 선악 대비구도로 후세에 각인됐다. 이런 김창룡의 유해를 98년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옮기면서, 특무부대 후신 국군 기무사가 예포까지 쏜 사실은 역사의 변전을 실감하게 한다.
상해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했다던 문민정부 말기에 국민 몰래 '적법'하게 이뤄진 이장(移葬)을 둘러싼 논란은 우리의 역사의식을 시험하는 어려운 숙제인 셈이다.
/강병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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