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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호가 만난사람] "시아버지 곧은 절개 제가 지켜갈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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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호가 만난사람] "시아버지 곧은 절개 제가 지켜갈거예요"

입력
2000.10.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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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며느리 이덕남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며느리 이덕남(李德南)을 개천절인 지난 3일 서울 개포동 시영아파트 그의 집 앞 작은 공원에서 만났다. 그가 독도로 본적을 옮겼다는 기사가 몇 신문에 난 얼마 뒤였다. 단재가 누구인가. “나라를 잃은 마당에 고개를 숙이면 왜놈에게 절하는 꼴”이라며 세수를 할 때도 꼿꼿하게 서서 했다던, 평생 굴함이 없던 항일독립투사로, 민족의 뿌리를 찾아낸 위대한 사학자로, 지조 곧은 선비로 우리 모두에게 깊게 각인된 사표가 아닌가. 1880년에 생(生)해 1936년 일제 치하의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몰(沒)한 단재의 가족사를 그의 며느리를 통해 들으면서 기자는 숙연함을 느꼈다.

이덕남은 올해 쉰 여섯이다. 12월8일이면 탄생 120주년이 되는 단재의 며느리가 되기에는 나이에서 무언가 어긋난다. “그런 말을 많이 듣는다. 하지만 내 남편이 단재 선생 41세에 태어났고 내가 남편보다 23살 어리니 다 더해보면 아귀가 맞을 것이다.“ 그가 남편 신수범(申秀凡)을 만난 것도 운명적이었다. 정신여고에서 농구를 했던 그는 졸업 후 서울시청 농구팀 주장을 맡고 있다 담석증에 걸려 수술을 받기 위해 제일은행에서 돈을 찾아 나오다가 은행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병원에 옮겨주~? 치료비를 대신 내준 사람이 신수범이었다. 신수범은 병원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춰달라고 당부했다. 이 바람에 퇴원 후에도 은인을 찾을 수 없었던 이덕남은 이듬해 `순국선열유족회'가 주최하는 3.1절 기념 농구대회를 준비하다 유족회 부회장을 맡고 있던 신수범이 자신을 살려준 은인임을 우연히 알게 됐다. “그 길로 그 분을 쫓아다녔다. 죽어도 내가 당신하고 결혼하고 죽겠다고 말했다.” 목숨을 살려준 은인과 결혼해 뒷바라지를 해야겠다는 그의 의지는 신수범이 이북에 1남3녀를 두고 온 기혼자라는 사실도 꺾지 못했다. “나라가 좋아지면 북에 남긴 식구들을 찾아와야 한다”며 혼자 살기를 고집했던 신수범과 결국에는 혼례를 올렸다. 1966년의 일이다. 그는 스물 둘이었고 남편은 마흔 다섯이었다.

신수범은 단재와 박자혜(朴慈惠) 사이의 맏이다. 박자혜는 숙명여고 2회 졸업생으로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당시 지금의 적십자병원 전신인 총독부병원 간호원장을 맡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만세를 부르던 동포들이 일본관헌의 총칼과 채찍에 상처를 입은 채 병원으로 쏟아져 들어오자 박자혜는 그 길로 만세운동에 동참한데 이어 근우회사건이라는 일제로서는 참을 수 없는 대사건을 일으켰다가 발각돼 중국으로 몸을 피했다. 북경대학 전신인 연경대학 의예과에 입학하면서 여자축구부를 만들어 주장을 맡기도 했던 박자혜는 15세 연상인 단재를 중매로 만나 1920년 결혼하게 된다. 단재는 중국으로 피하기 전 초취부인 조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를 두었지만 그 아들은 여섯 달만에 숨졌다.

단재와 박자혜의 신접살림은 겨우 세 달 지속되었다. 단재의 독립운동 때문이었다. 결혼 촛m 달 만에 동지들과 함께 집을 나갔던 단재는 약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박자혜에게 이제 두 돌이 갓 지난 아들을 업고 조국으로 돌아가라고 종용했다. `독립운동에 훼방이 된다'는 말과 함께.

박자혜와 신수범이 단재를 다시 만난 건 조국으로 돌아온 지 8 년 만이었다. 몸을 돌보지 않은 독립운동 끝에 단재는 영양실조로 인한 실명위기에 처해지자 시력을 잃기 전에 아들의 얼굴은 익혀야 겠다며 아내에게 아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8년만의 재회도 한 달밖에 계속되지 못했다. 의료인 출신인 박자혜의 극진한 간호로 실명위기를 넘긴 단재는 다시 모자를 조국으로 돌려보냈다. 역시 독립운동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게 박자혜와 신수범이 단재를 만난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단재도 박자혜도 그 한 달 사이에 둘째 아들 신두범(申斗凡)이 잉태됐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남편은 시아버지가 참으로 따뜻했다고 자주 말했다. 처자를 돌보지 않는 무정하기만 한 줄 알았던 아버지가 그 한달 사이 시간만 있으면 팔베개를 해주면서 이런 말씀 저런 말씀을 해주시는 게 참 자상했다고 말했다.” 다시 서울로 돌아온 박자혜와 신수범의 삶은 간난의 연속이었다. “남편은 종로에 있는 교동국민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이 되자 일경이 책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중국에 있는 시아버지가 무슨 소식을 보냈는가를 알기 위해서 였다.” 일경은 처음에는 신수범에게 먹을 것을 사주고는 단재의 소식을 알아내려고 온갖 회유를 하다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면 2학년짜리 어린이를 마구 팼다. 박자혜도 마찬가지였다. 생계를 위해 배운 지식을 밑천으로 산파를 차렸지만 일경은 그에4?게 출산을 맡긴 산모의 집안까지 박해를 했다. 일경의 방해로 혹독한 궁핍에 시달리던 박자혜는 결국 둘째 신두범을 14살 때 영양실조로 잃게 된다. 하지만 박자혜는 나석주(羅錫主)선생이 의거를 위해 서울로 잠입했을 때 길 안내를 하는 등 독립지사의 아내로 하나 부끄러움 없이 처신했다. 이덕남이 찾아낸 일경의 문서에 따르면 박자혜는 `대단한 달변으로 순악질 언론을 펴는 요주의 인물'로 되어있다. 신수범은 다 크기 전까지는 아버지 이름을 몰랐다. 아들이 혹시 말 실수를 할까 봐 어머니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자혜는 신수범이 15세가 되던 해 비로소 그를 불러 부친이 `단재 신채호'임을 알려주고는 “너만 알고 있어라. 아버지 이름을 입밖에 내는 순간 혀를 자르겠다”며 옆에 둔 식칼을 내보였다. “단재선생 때문에 가려졌지만 시어머니도 정말 기개가 대단하신 분이었다. 그 분에 대한 이야기도 책 한권은 넘을 것”이라고 이덕남은 말했다.

단재 가족의 헤어짐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한성상업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신수범은 19이 되던 해에 중국대륙과 만주벌판에 남아있을 아버지의 족적을 찾기 위해 첫 직장으로 중국에 있던 금융회사인 `마전금융단'을 선택하고 중국으로 떠났다. 신수범이 어머니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들을 중국으로 보내고 홀로 남아있던 박자혜는 세 들어 살던 아들 친구집 문간방에서 지켜보는 이 없이 쓸쓸하게 운명했다. 아들이 떠난지 1년 뒤인1943년의 일이다. 신수범의 친구는 박자혜를 화장해 친구가 돌아오면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유골을 보관하고 있었지만 해방과 한국전쟁 등 격변기를 거치면서 제대로 지킬 수 없었다. 해방을 맞아 육로로 환4?국하던 신수범은 3.8선에 막혀 5년을 북쪽에 머물다 전쟁으로 3.8선이 무너지면서 남쪽으로 내려올 수 있었지만 끝내 어머니 유골을 찾지 못했다.

이덕남은 결혼 후 한동안 그의 남편이 단재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다. 아니 단재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 단재가 누구인지, 우리 근세사에 단재가 차지하는 크기도 가늠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경남 김해가 고향인 이덕남은 “어떻게 하다 서울 정신여고에 입학하게 됐다.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닐 형편이 못됐는데 학교에서 농구를 하면 밥은 먹여주었으니 3년 동안 농구만 했다. 그러니 내 머리 속에 뭐가 들었겠는가. 남편이 순국선열유족회 부회장이었지만 결혼할 때에도 순국선열이 무언지 몰랐다.”

당시의 아녀자 키로는 비교적 큰 편인 165센티의 키에 운동선수 특유의 활달하고 숨김없는 성격의 그는 결혼 후 남편이 시아버지의 유고 등 관련자료를 모으는 걸 도우면서 단재를 공부하게 된다. “남쪽으로 내려온 남편은 시아버지의 동지였던 신백우선생이 보관하고 있던 시아버지의 유고를 돌려 받았으나 워낙 배가 고파 누군가에 맡기고 돈으로 바꾸었다. 나중에 유고를 찾으러 갔으나 전쟁 중이어서 그 사람을 찾지 못했다. 남편은 그 게 한이 되어 돈이 생기면 시아버지 관련자료만 모았다. 잃어버린 유고보따리에는 조선상고사 조선사연구초 독사신론 등의 친필원고가 들어있었다.”

신수범과 그가 그동안 찾아 모은 단재의 자료는 라면상자 25개 분량이 된다. “나는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밥을 먹은 것은 두 달밖에 안 된다. 은행원이었던 남편은 두 달만 월급을 집에 갖다주었을 뿐 나머지는 모두 자료수집에 다 썼Xm . 그 덕에 여태껏 내 집에 살아본 적이 없다. 내가 했던 일도 양장점 신발가게 집장사 등 서른 가지는 됐을 것이다. 거기서 번 돈도 물론 자료수집에 들어갔다.” 신수범은 제일은행과 신탁은행을 거쳐 1974년 정년퇴직한 후 광복회총무부장을 지내다 1991년에 아들 딸 남매를 남기고 일흔으로 별세했다.

남편에게 배운대로 지금도 밤이면 자전을 펼쳐놓고 시아버지의 글을 읽는 그는 “주야장천 단재 선생이 옆에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민족을 무시하면 역사가 없고, 역사를 무시하면 나라가 망한다.” 그가 여태 읽어온 단재의 글 중 제일 깊이 가슴 속에 담아둔 구절이다. “나라가 점점 혼탁해지는 게 우리가 역사를 무시했기 때문 아닌가.” 그가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나라강도 막으려 독도로 본적 옮겼죠"

그는 얼마 전 독도로 호적을 옮겼다. 일본 사람들이 독도를 제 땅이라고 우기는 게 강도를 보는 것 같아서 였다. “집에 들어온 강도도 쉽게 못 쫓는데 나라에 들어오는 강도는 더 쫓기가 힘든 게 아니냐. 나처럼 한 사람 두 사람이 독도를 지키다 보면 강도가 들어오기 어려울 것 아니냐.” 그가 독도로 본적을 옮기자 다른 독립투사 후손 몇 명도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요즘도 단재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한편 소식이 닿는 독립지사 후손들과 교분을 자주 갖는다. “물질적으로는 서로 도울 것이 없는 사람들이지만 만나면 정신적으로는 큰 의지가 된다. 경조사가 있으면 빠짐없이 만나는데 11월에는 여럿이서 독도를 가볼 생각이다.”

그는 얼마 전 중국에 갔다가 단재가 1923년에 4?김창숙(金昌淑)과 함께 창간한 월간지 `천고(天鼓)' 2권을 찾아내 복사를 해왔다. 300만원이 들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 관련 세미나가 열린다고 해 정부로부터 500만원을 지원받아 갔는데 세미나가 무산됐다. 그러다 천고 2권을 보게 돼 그 중 300만원으로 복사비용을 지불했는데 정부에서는 용도와 달리 사용했다며 전액변제를 요구해왔다. 횡령죄로 고소야 하진 않겠지만 참 잘하는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은 단재의 모습을 제대로 복원하는 일이다. “춘원 이광수가 어느 잡지에 시아버지의 모습을 `까까머리에 아주 작은 키, 때 묻은 두루마기에 볼 품이 없었으나 형형히 빛 나는 눈만은 볼 것이 있더라'라는 식으로 남겨 놓아 모든 사람이 단재가 아주 왜소한 사람으로 알고 있고 흉상이나 동상도 그렇게 제작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중국에서 찾아낸 단재의 전신대 사진을 보면 그렇게 작은 체구가 아니다. 남편도 비교적 키가 큰 편이었다. 시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전하고 싶다”

그는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23살 연상인 남편도 시아버지와 함께 살아본 건 평생동안 네 달밖에 되지 않는다.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남편은 돌이 지나자 어머니 등에 업혀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15살이 되도록 알 수 없었다. 평생 식솔의 호구에 신경 쓰지 않았던 시아버지처럼 그의 남편도 26년을 함께 살면서 월급을 집에 가져온 적은 두 번밖에 되지 않는다. 그래도 그는 시아버지와 남편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의 시아버지는 일제하의 조국독립에 신명을 바친 분이며, 그의 남편은 그런 시아버지의 흔적을 찾는데 평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독립지사의 후손들처럼 그도 가난을 떨친 적이 없지만 살아온 길을 후회한 적은 없다.

편집국 부국장 soong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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