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담론의 산실](20.끝) 계간 '현대사상'
알림

[담론의 산실](20.끝) 계간 '현대사상'

입력
2000.05.23 00:00
0 0

■호사가를 끄는 이념적 다양성프랑스의 사회학자 레몽 아롱은 1940년대 후반 창간기의 르몽드에 잠시 협력하다가 르피가로로 자리를 옮겨 오래 일했다. 그는 뒷날 일자리를 옮긴 이유를 묻는 한 잡지사 기자에게 르피가로가 ‘시크(chic)’한 신문이어서 그랬다고 회고한 바 있다. 프랑스어 ‘시크’를 우리말로 정확히 옮기기는 어렵다. 얼추 ‘멋들어진, 우아한’ 정도로 옮길 수 있겠지만, 이 말의 구어적(口語的)·속어적(俗語的) 뉘앙스를 감안하면 ‘폼나는’이라는 말이 더 적절한 역어일 법도 하다.

아롱의 그 회고를 반드시 진지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부른 마르크스의 말을 비틀어 마르크시즘에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딱지를 붙여준 이 우파 이론가의 취향을 생각하면, 중도좌파적 입장의 신생지 르몽드보다는 19세기부터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입장을 대변해 온 전통적 우파 신문 르피가로가 아롱에게는 더 마음 편한 자리였을 것이다.

일터를 바꾼 이유를 말하며 아롱이 진지했든 그렇지 않았든, 르피가로라는 신문이 ‘시크’했던 것은 사실이다. 창간기에는 왕당파적 입장을 취했던 이 신문은 19세기 말부터 부르주아지의 신문을 자처하며 점차 온건한 공화주의적 입장으로 선회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의 지식인 사회와 문화계를 장악한 마르크시즘에 맞서 ‘시크’하게 우파 이념과 우익 정파를 옹호했다.

아롱은 르피가로의 ‘시크’함에 반했다고 하지만, 정작 이 신문을 ‘시크’하게 만든 것은 아롱 자신의 빛나는 논설들이었을 것이다. ‘지식인’이라는 말이 ‘좌파 지식인’이라는 말과 동의어로 통용되던 시절에, 그는 명료하고 격조있는 문장으로, 곧 ‘시크’한 문장으로 조심성있는 보수주의를 전파하며 르피가로의 한 위대한 시절을 이끌었다. 아롱이 없는 지금의 르피가로는 그리 ‘시크’해 보이지 않는다.

계간지 ‘현대사상’(편집 주간 김성기)도 ‘시크’한 잡지인 것 같다. 물론 ‘현대사상’은 우파 잡지가 아니다. 이 잡지를 주관하는 사회학자 김성기씨는 자신을 좌파라고 공언하고 있고, 이 잡지에 글을 기고하거나 이 잡지가 다루는 인물들도 그 주류는 좌파 지식인의 범주에 든다.

그러나 이 잡지는 표지 디자인에서부터 편집의 체제와 내용에 이르기까지 지식인 잡지로서는 도드라지게 ‘시크’하다는 느낌을 준다. 모더니티, 문화연구, 대학의 미래, 제3의 길 등 우리 지식인 사회의 의제를 설정하며, 그리고 유럽이나 미국의 새로운 사조를 흡수하며 보여주는 이 잡지의 민첩함이 그 ‘시크’한 이미지를 강화하는 것 같다.

이 잡지를 ‘좌파 잡지’라고 할 때, 그 좌파 이념은 매우 널따란 스펙트럼을 지닌다. 여전히 ‘자본주의 이후’를 꿈꾸는 정통파에서부터 무정부주의적 기미를 보이는 래디컬 자유주의자를 거쳐 비(非)파쇼 보수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이 잡지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좌파성’은 들쭉날쭉이다. 그래서 ‘현대 사상’이 보여주는 것은 입장이 아니라 입장들이고, 사상이 아니라 사상계의 지형도다.

르피가로의 ‘시크’함과는 다른 의미로 ‘현대사상’을 ‘시크’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이념적 다양성이다. 일본 음식이 대개 그렇듯 생선회는 맛도 있지만 보기도 좋다. ‘현대사상’은 바로 그런 생선회 같은 잡지인데, 이 잡지는 ‘그냥회’가 아니라, ‘모듬회’인 것이다.

그런데도 이 잡지가 산만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내적 질서 속에서 일종의 화성(和聲)을 이루는 듯 보이는 것은 김성기씨의 ‘시크’한 편집 능력 덕분일 것이다.

‘현대사상’은 대체로 일관된 편집 체제를 유지해오고 있다. 매호에 ‘커버 스토리’ 격인 기획 특집이 있고, 주로 외국의 인문·사회과학자를 대상으로 한 ‘특별대담’이 있으며, 김성기씨가 직접 국내 지식인을 인터뷰하는 ‘오늘의 지성을 찾아서’가 있다.

물론 ‘현대사상’이라는 모듬회에는 별미 생선들도 많이 오른다. 그것들은 주로 ‘쟁점과 비평’이라는 난에 모여 있다. 게다가 이 회에 오른 생선들은 대체로 신선하다. 보기 좋고 맛깔스럽고 신선함, 거기에다가 종(種)의 다양성, 그것이 ‘현대사상’의 ‘시크’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 잡지가 좋은 의미의 딜레탕트의 잡지, 호사가의 잡지라는 뜻이기도 하다.

● 창간사

중요한 것은 이 시대의 지식행위와 그 행위를 업으로 삼는 지식인들이 현실과의 성찰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급변하는 시대의 정황에 제대로 대응하느냐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학제 연구도 좋고 새로운 대안적 접근법의 탐색도 긴요할듯 싶으나, 더 근원적인 과제는 자신의 성찰과 비판력을 현실에 삼투시키는 지식인 문화의 형성에 있다. ‘현대사상’은 그러한 지적 도정에 동반자로 나서기로 했다.

현실과 소통하고, 그 소통을 매개로 하여 오늘과 내일의 세계를 일구는 지식 행위의 복권을 주장한다. 복권이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돌이킨다는 의미를 담는다. 우리는 이 시대의 지식 행위가 본디 성찰의 힘을 되찾고서 현실의 개조와 개선에 개입하기를 희망한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