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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내맘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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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생각] 내맘대로

입력
2000.0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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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아, 햇살이 어느 새 이렇게 도타워졌냐』 나는 비닐봉지에 올망졸망 묵은 나물을 꺼내 물에 담그다 말고 놀러온 손녀에게 말을 시켰다. 저절로 나온 감탄사였을뿐 대답을 기다리고 한 말은 아니었다. 말해 놓고 나서 그건 내 목소리가 아니라 어릴 적 듣던 할머니나 어머니의 목소리였던 것같아 아득해졌다. 목소리뿐 아니라 말투까지 영낙 없이 그들처럼 말하고 있었다.손녀는 흘긋 한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 없이 보던 만화책에 다시 열중했다. 그 애는 아마 햇살이 도타워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못알아 들었을 것이다. 나도 그맘때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다. 동지 지난 지 며칠만 되면 할머니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아침해가 비치는 봉창을 바라보면서 『야아, 해가 노루꼬리만큼 길어 졌지』하고 말을 시키곤 했다. 그 소리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햇살을 길이나 부피로 헤아리는 경지는 나이와 함께 오나보다. 늙어 빠지면 길이와 부피뿐 아니라 무게로까지 느끼게 된다. 햇살은 이제부터 춘분 무렵까지가 어깨에 지고 다니기 알맞는 무게가 된다. 그때가 되면 그 무게가 벌써 노구(老軀)에는 버거워지고 만다.

아주 벽촌에서 유년기를 보냈는데도 음력에 설을 쇤 기억이 없다. 떡 하고, 엿 고고, 두부 만들고, 차례 지내는 행사를 모조리 양력 신년에 했다. 그 때 우리 집은 뭐든지 할아버지 맘대로였다. 결코 신식 할아버지는 아니었고, 양력을 권장하다 못해 강요한 식민지 시대였지만 일제가 하란다고 할 분도 아니었다. 끝끝내 창씨를 못하게 한 것도 그 분이었으니까. 방학해서 손자들이 귀향해 느긋하게 쉴 때 차례를 지내지 무엇하러 놀려주지도 않는 날 도둑질하듯이 급하게 차례를 지내냐는 것이었다. 그 분은 이렇듯 차례나 제사를 산 사람들이 될 수 있는대로 편하게 많이 모일 수 있는 축제 정도로 생각했다. 여자들도 다들 차례나 제사에 참예토록 한 것도 상투 튼 어른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창씨를 안한 것보다 그게 더 자랑스럽다.

결혼하고 내 살림을 하게 된 후 지금까지 우리 집 역시 양력으로만 설을 쇤다. 양력으로 신년은 틀림 없이 아이들 방학 중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해방이 되자 우리 정부는 음력에 설을 쇠는 걸 금하지는 않았지만 설 연휴가 따로 생긴 것은 근래의 일이다. 그렇지만 손자들이 모여서 며칠씩 지지고 볶아도 시간에 좇기지 않고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는 건 역시 방학 중이 좋다. 또 양력을 권장했다 음력을 권장했다 정부가 이랬다 저랬다 하는 대로 따라 하지 않고 맘대로 하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내가 음력 설날을 덤덤하게 지내는 건 아니다. 남들이 일제히 법석을 떨 때 그 집단적 열정에서 몇 발자국 비켜나서 구경하는 재미는 또 얼마나 좋은지 혼자 맛보기 아까울 지경이다. 보따리 보따리 싸들고 고향 가는 사람으로 붐비는 서울역이나 버스터미널, 주차장을 방불케 하는 고속도로를 온종일 비쳐주는 TV를 보고 있으면 매를 먼저 맞고 난 사람처럼 근심 걱정은 사라지고 저절로 한유(閑遊)의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또 1년 중 가장 극심해지는 시장판의 물가고와 속임수에서 비켜나 있을 수 있는 것도 이게 웬 떡이냐 싶은 가외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설만 쇠고 나면 완연하게 도타워지는 햇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설 쇠고 나서도 기온이 영하 10도 아래로 내려가는 날이 많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햇살이 도타워지는 게 선명하게 들어나 보였다.

융단처럼 도타워진 햇살의 무게가 답답해서 땅 속의 씨앗과 뿌리들이 일제히 기지개를 켜며 왁자지껄 깨어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투명한 날이다. 나는 대보름에 먹을 오곡밥과 나물 준비를 하고 있다. 설은 음력으로 안쇠지만 음력 대보름을 놓친 적은 없다. 묵은 나물이 가장 맛있어지는 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도 내맘이다.

소설가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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