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는 국립중앙도서관 서고에 묻혀있던 조선 중기의 희귀 연행 화첩을 발굴해 현장을 직접 답사한 관동대 박태근(朴泰根) 객원교수의 글을 10일부터 매주 월요일자에 연재합니다. 박교수와 미술사학자 최정간(崔楨幹)씨가 찾아내서 고증한 이 화첩은 1624년 인조의 왕권 승인을 받기 위해 바다 건너 명나라로 향하는 이덕형(李德炯), 홍익한(洪翼漢) 등 사절의 행로를 담고 있습니다. 화첩으로 묶인 25장 그림은 육로가 아닌 해로를 통해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가는 외교사절단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국내 유일의 귀중한 문화재입니다. 그림들은 높은 역사성과 함께 유려하고 사실적인 화법으로 조선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지난해 10월 26일 인천항을 출발해 한 달여 동안 당시 연행사들의 행로를 좇은 박교수는 내란과 외환의 어려움에 처했던 당시 조선의 형편, 조선과 중국의 풍물과 풍속, 400년의 변화 등을 화첩의 그림과 함께 글에 담아낼 것입니다.
■仁祖 승인 제청위해 명나라에 이덕형을 파견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외교 관례에 따라 조선 정부는 해마다 몇 차례의 외교사절을 중국 수도 베이징(北京)에 파견했다. 이름하여 「연행사(燕行使)」라고 부른다.
조선사절의 중국행 정규 통로는 서울→의주→압록강 도하→중국 동북부 랴오둥(遼東) 지방의 중심 랴오량(遼陽)을 거쳐 산해관(山海關), 베이징에 이르는 육로 코스이다. 그러나 1621년(광해군 13년)에서 1637년(인조 15년)까지의 17년 동안은 적대 세력인 청(淸)이 랴오둥 지방을 점령해 통행이 불가능하므로 부득이 정치적 긴급 피난으로 해로를 통해 중국을 내왕했다.
출항 기지인 선사포항(평안북도 곽산군)에서 바닷길로 랴오둥 반도의 연안 도서인 다루다오(大鹿島), 스청다오(石城島), 창산다오(長山島), 광루다오(黃鹿島)와 뤼순(旅順)을 거쳐 버하이(渤海) 해협의 먀오다오(廟島) 열도를 지나 산둥(山東) 반도의 덩저우항(登州·지금의 봉래시)에 상륙한다. 그 뒤 육로로 산둥성, 허베이성(河北省)을 북상, 베이징에 이르는 코스이다.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그 거리는 5,660리(수로 3,760리, 육로 1,900리)로 종전 길의 2배 반이나 된다. 이때 우리나라는 청의 침략전쟁으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두 차례의 큰 국난을 겪었으며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1637년에 이르러 전통적인 대명(對明) 관계는 끝내 단절되고 만다.
랴오둥 지방에서 명·청 간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는 1620년 초 베이징행의 주문사(奏聞使)인 이정구(李廷龜)에게 국왕 광해군은 청의 승리로 조선사행의 귀국길이 막힐 것을 우려해 대책을 명령했다. 이정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경우 톈진(天津), 뤼순을 거쳐 해로로 항해, 귀국하겠다고 했다. 광해군은 정치적으로 실패한 군주였지만 국제적 감각은 탁월했다. 이정구는 그 뒤 무사히 육로로 돌아왔지만 왕의 예언은 적중하고 만다. 약 15개월 뒤인 1621년 3월 19일 청이 랴오량(遼寧)을 점령, 명은 랴오둥의 전역을 잃어 조선_중국 루트는 마침내 단절된다.
1621년 베이징의 조선사절들은 귀국길이 막혀 명의 선박으로 항해, 귀국할 때 정사 이필영(李必榮) 일행만 무사하고 나머지 사절들, 즉 정사 박이서(朴彛敍) 유 간(柳 澗), 서장관 정응두(鄭應斗) 등은 해난사고로 최초의 희생자가 된다. 수로 정보와 항해 경험의 부족으로 초기에 해난사고가 빈발했기 때문에 사절을 기피하는 신료(臣僚)들이 많아 정부는 무척 고심했다. 명·청 사이에서 현실 외교를 편 광해군이 전통적인 대명 외교를 유지하기 위해 해로로 파견한 사절은 1621년의 권진기(權盡己) 최응허(崔應虛) 사행을 비롯해 1622년 오윤겸(吳允謙) 이현영(李顯榮) 사행 등 모두 4차례이다.
1623년 이른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하고 국왕이 된 인조의 사행은 명에 왕권 승인을 제청하기 위해 파견된 1623년의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 이경전(李慶全) 사행, 1624년의 사은겸주청사(謝恩兼奏請使) 이덕형(李德泂) 사행이며 마지막 사행은 1636년 병자호란 전에 베이징에 갔다가 다음해 난 후에 귀국한 김 육(金 堉) 사행이다.
항해하는 조선사절의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불안한 운명은 동아시아 격동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과 어찌나 그리 닮았는지! 둘다 거친 풍랑 속에서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난파선의 신세였다. 이때 조선왕조는 역사상 꼭 두 번, 「내란(인조반정)」과 「외침(병자호란)」을 동시에 치른 것이다. 자신과 조국의 조난(遭難)이란 겹친 위기 속에서도 조선사절의 발길이 무겁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모진 바닷길에서 벗어난 덩저우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길은 「사기(史記)」와 「삼국지(三國志)」의 고장으로 중국적 교양과 감성을 지닌 그들에게는 일찍이 옛 사람들이 이룰 수 없었던 초유의 문화충격이요, 역사기행이다.
「연행도폭(燕行圖幅)」은 해로시대의 중국행을 그린 현존하는 유일한 그림이다. 한·중 우호관계의 역사기록화로 높은 역사성과 함께 그 유려하고 사실적인 화풍은 진한 예술성을 지닌다. 역사 풍경을 모티프로 인물, 자연, 사건, 일상성 등을 적절히 배합해서 화폭 위에 절묘한 화음을 이룬다. 총 25폭의 그림 중 사행의 출발에서 귀환까지 단 한 장의 낙장이나 훼손도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375년이란 아득한 세월을 딛고 우리에게 다가선다. 회화 사료가 영성(零星)한 조선조 중기 실경산수화의 백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연행도폭」에는 아쉽게도 서문, 발문, 서명, 낙관 등이 전혀 없어 연대와 작자를 알 수 없었으나 고증 결과 1624년(인조 2년)의 이덕형 사행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이때 서장관 홍익한(洪翼漢)의 일기 「화포조천항해록(花浦朝天航海錄)」(별도 기사 참조)이 미스터리를 푸는 좋은 키워드가 됐다. 3번째 그림은 스청다오 상공에 용이 그려져 있어 실경이 아니므로 이해할 수 없었으나 홍익한은 1624년 8월 12일조(條)에 스청다오에서 용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고 적어놓아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또 14번째 그림(濟南)에 태산순례단을 그렸는데 홍익한은 같은 해 9월 29일조에 지난(濟南)에서 태산순례단을 목도했다고 썼다.
첫 번째 그림 「선사포 출항도」는 화첩의 그림 중에서 가장 탁월한 구성과 기법을 뽐낸다. 앞쪽은 전통적인 해파묘(海波描·물결 무늬)로 그린 바다가 넘실댄다. 가마를 타고 바닷가로 가는 정사, 부사인 듯한 두 관원과 종자들의 인물상은 인형처럼 딱딱하지 않고 굴신(屈伸) 동작이 아주 유연해 생동감이 넘친다. 또 선사포의 관아, 성곽이 고도의 계화수법(界畵手法)으로 잘 다듬어져 있고 뒷산과 촘촘한 나무들은 가파른 산모양을 토파준(土坡준)으로 잘 처리해 산수화, 인물화, 계화가 잘 어우러진 대 파노라마를 연출한 느낌이다.
홍익한은 그림에 없는 뱃사공인 아들과 작별한 백발 노인의 통곡의 눈물, 부사 오 숙(吳 숙)의 애기(愛妓)인 애운(愛云)의 비오듯 흐르는 이별의 눈물을 묘사하고 있다.
준:人 없는 俊에 皮 방
숙:肅에 羽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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