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블라디미르 푸틴(47) 대통령 권한대행 체제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구랍 31일 보리스 옐친(68) 대통령이 터뜨린 「세기말 사임」의 충격은 뉴밀레니엄의 시작과 함께 어느덧 옛 이야기가 된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개혁이라는 「차르(황제) 보리스」의 이념은 생생히 살아있었다.푸틴은 1일 신년사를 통해 『러시아는 옐친을 통해 민주주의와 개혁의 길을 채택했으며 강력하고 독립된 국가로 부상했다』며 「옐치니즘」(Yeltsinism)을 계승할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어 『이 나라에서는 한순간도 권력의 공백이 없을 것』이라며 『법률과 헌법의 틀 밖에서 행동하려는 시도는 단호히 분쇄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 등 세계 각국은 옐친의 사임이 급변사태가 아니라 용퇴(勇退)로 분석되자 일제히 푸틴이 주도하는 러시아와의 협력 강화를 피력했다. 러시아 정계도 옐친의 사임을 환영했고 증시는 폭등했다. 라디오 방송인 에코 모스크바의 여론조사 결과 58%가 옐친의 사임에 대해 『기쁘다』고 답했다.
옐친의 사임은 일단 사후 신변보장을 염두에 둔 옐친의 「정치적 승부수」였던 것으로 해석됐다. 푸틴은 대권을 넘겨받은 즉시 옐친과 그 가족의 신변을 보장하는 법령과 옐친에 대한 총괄적 면책을 내용으로 하는 대통령 법령에 서명했다. 옐친에게 「안전한 퇴장」의 길을 열어준 셈이다. 일부 현지 언론은 「궁정 쿠테타」 등 권력투쟁에 의한 퇴장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근거를 밝히지못했다.
하지만 푸틴이 주도하는 「포스트 옐친」시대는 그리 녹록해 보이지않다. 푸틴은 우선 3월24일로 앞당겨 실시하는 대통령선거 이전에 자신이 주도한 체첸 전쟁을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것이다. 그의 인기는 사실상 체첸전에서 보여준 리더십에 기인한 측면이 강하다. 때문에 조만간 그로즈니 함락을 위한 총공세 등 초강경책이 구사될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
이와 함께 푸틴은 서방 유화책으로 경제의 숨통을 터야할 것이다. 그는 옐친으로부터 핵발사 암호가 든 「핵가방」을 인계받은 직후 첫 성명에서 『러시아의 외교정책 기조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돈줄」을 쥐고 있는 미국 등 서방은 당분간 주시하겠다는 분위기다. 여기에다 지난 총선에서 패배한 유리 루시코프 모스크바시장 등 대선 경쟁자들이 힘의 공백을 이용, 새 분위기 조성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
푸틴은 옐친으로부터 권력을 양도받았지만 결국에는 옐친의 그늘을 벗어나야 하는 정치적 모순을 안고 있다. 그는 신년사에서 『표현, 양심, 언론 자유와 사적 소유는 문명사회를 규정짓는 요소』라고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도 『비밀경찰은 종전처럼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력적이고 확고하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현재 겪고 있는 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을 염두에 둘때 러시아의 민주주의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로 변질될지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