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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에세이]박인경씨의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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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우에세이]박인경씨의 경우

입력
1999.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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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KBS 2TV의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란 프로에서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씨의 10주기 추모전시회에 참석하러 파리에서 와 있던 부인 박인경(朴仁京)씨와의 대담이 장시간 방영되었다. 이 자리에서 박씨는 1977년에 있었던 백건우(白建宇)·윤정희(尹靜姬)씨 부부의 납치미수사건을 묻는 질문에 『나도 그 사건이 어떻게 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본인들이 알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아직도 못다한 이야기가 기껏 이말인가.이 사건이 일어났을 당시 나는 신문사의 파리특파원으로 현장에 있었고 현장에서도 가장 중심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북한측 공작에 의한 피랍을 가까스로 모면하고 유고에서 파리로 갓 돌아온 백씨 내외를 맨먼저 만나 제1보를 본사에 송고한 것이 나였고, 이 여행을 주선하여 함께 갔다온 박인경씨를 자택으로 찾아가 일문일답을 한 유일한 기자가 나였다.

이 때 박씨는 백씨를 유고의 연주회에 초청하게 된 경위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회피하면서 『나는 이 사건을 북한의 납치 음모로는 보지 않는다. 백건우내외가 나에게 누명을 씌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번 TV대담에서 박씨의 태도가 22년전 그때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음을 보고 나는 놀란 것이다. 그렇다면 박씨가 어떻게 한국의 TV에 저렇게 당당히, 싱글싱글 웃어가며 나올 수 있는가.

당시 사건의 자초지종으로 미루어 북한의 공작이 아닌 것도 아니었고 박씨가 그것을 절대로 모를 일도 아니었다. 자신이 알고 저지른 일이 아니라면 사건 경위에 나타나는 수많은 의문점은 차치하더라도 사건 직후 진상조사를 위한 파리주재 우리대사관의 소환에 왜 불응하고 5개월동안이나 파리에서 자취를 감추었을까.

이 사건에 직접 관여된 흔적이 없는 이응로씨는 처음에 『백건우 내외의 말을 듣고보니 간첩소리를 듣게 됐어』라고 부인을 나무랐다가 얼마 뒤에는 『한국정부가 조작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박인경씨는 이 음모설을 아직도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의아스러운 것은 이런 박씨가 어떻게 한국에 무상출입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박씨는 1994년 고암의 5주기 추모전 때 동베를린사건에서 사면되어 출국한 후 25년만에 처음 귀국했고 그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자신의 개인전을 열고 시집 출판기념회도 가졌었다.

백건우씨 내외는 납치미수사건 이후 20년이 넘도록 같은 파리에 살면서 아직도 박씨와는 관계를 단절한 상태에 있고 박씨의 한국 출입에 경악하고 있다. 당사자인 백씨 내외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 시민들로서도 아무 화해의 절차를 밟지 않은 상태에서 박씨가 한국을 드나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씨는 납치미수사건의 진상에 대해 해명한 적이 없을뿐 아니라 적어도 자신이 개입한 일이 결과적으로 소동을 일으킨데 대해서 조차 누구에게도 사과 한마디 한 적이 없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딴전을 부리고 있다. 정말 박씨가 모르는 일인지 잘 아는 일인지, 아무 일도 아닐 것인지 큰 일일 것인지, 국내에 들어와서 조사를 받은 일도 없다. 그런채로 고암의 전시회에서는 현직 장관이 박씨와 나란히 테이프커팅을 하고 박씨는 국내에서 가는 곳마다 귀빈 대접을 받는다.

고암 일가는 납치미수사건 이후 파리에서 우리 교민사회와는 완전히 담을 쌓아왔다. 10년 전 고암이 별세했을 때 장례식에는 북한의 파리대표부 대사와 유네스코주재 대사가 대형 화환을 차에 싣고와 참석했고 한국측 조문객은 파리문화원장 뿐이었다. 그런 관계의 상태에서 박씨는 고암의 그림에 편승하여 개선하듯 국내에 들어온 것이다.

민족의 비극에 희생된 고암의 비극은 가슴 아픈 일이다. 우리 미술사의 한 거장으로서 그의 예술은 길이 평가되어야 하고 한국에서의 전시회가 그 예술정신을 추모하는 것은 마땅하다. 박인경씨에게도 고국이 금족(禁足)의 땅일 수는 없다.

다만 정부는 백건우씨 일가의 납치미수사건 의혹에 대해 박씨가 밝힐 것은 밝히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양심범의 입장이라면 그런대로 태도를 분명히 천명한 뒤라야 입국시키는 것이 옳다. 박씨가 아직까지도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우리 사회를 속이는 일은 위조여권을 가지고 입국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한국은 대문 없는 나라가 아니다. 사회가 너무 빡빡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멍청해서는 더욱 안된다. /본사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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