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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사 이범석 장관/재기 넘치는 화술의 대가(한국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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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신사 이범석 장관/재기 넘치는 화술의 대가(한국의 추억)

입력
1998.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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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첫 방문 북 대표 “많은 차 어디서 모았나”에/“건물옮기는 일은 더 힘들었죠” 응수 일화 생생/66년 의전국장때 첫 만남/이글거리는 눈빛 지성 번득/82년 대사­외무장관 호흡/랑군테러로 친구 잃은후 추도행사 빠짐없이 참석/방한때마다 유족과 만나87년 1월 주한 미대사 임기를 무사히 마친 나는 아내 세니와 함께 하와이와 워싱턴에 들러 임무완수 보고를 한 뒤 사우스 캐롤라이나주 컬럼비아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우리는 서울에서 가재도구 등 이삿짐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그 무렵 이범석 장관의 부인 이정숙 여사가 우리 집을 방문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고, 우리는 1월19일 컬럼비아 공항으로 그녀를 마중나갔다. 당시 우리집은 변변한 가구 하나 없이 썰렁했지만 그녀를 가족처럼 따뜻하게 맞았다.

 다음날인 1월20일 아침 마침내 이삿짐을 실은 차량이 도착했다. 우리는 이여사에게 이삿짐 목록을 점검하는 일은 물론 가재도구의 배치와 집안정리 등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우리 부부가 스스럼없이 이런 부탁을 한 것 자체가 우리와 이여사 사이에 싹튼 특별한 우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실내장식에 각별한 취미가 있었다. 그녀와 아내 세니는 서로 뜻이 잘 통하는 사이였다. 우리집 현관 계단에 선채 이삿짐 목록을 체크하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내 가슴속에 또렷이 남아 있다.

 나는 이범석씨를 66년 처음 만났다. 그는 첫만남 때부터 강한 신뢰감을 느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람중 한명이었다. 당시 그의 직함은 외무부 의전국 사무국장이었다. 그때 외무부를 방문한 나는 그와 만날 기회를 갖게 됐고 자연스럽게 시간을 함께했다. 나는 이 박사를 그가 원하는대로 「범」(Bum)이라고 불렀고, 그는 나를 「딕시」(워커 전 대사 애칭)라고 불렀다.

우리는 서로 죽이 맞았다. 나는 이내 그가 재기 넘치는 인물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는 또 과장됨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능력을 타고 났다. 영어에도 능통했으며 이글거리는 눈빛에는 지성이 번득였다. 나같이 오랜 세월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본 사람들은 흔히 강의도중 학생들을 죽 훑어보는 버릇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눈빛만 봐도 누가 비범한 학생인지를 쉽게 가려낼 수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도 이씨는 확실히 보통이 아닌 사람이었다.

 그는 70년대초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를 지냈으며, 남북 적십자회담의 남측 대표로 참석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이었다. 이대표와 그 부인은 고향이 평양이었다. 서울로 유학오기전에 명문 평양고보를 졸업했던 그는 46년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72년 8월 대한적십자사 대표단을 이끌고 북한을 방문했다. 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 관리들은 이(고)모를 포함한 친척들을 동원해 그를 매수하려고 했다. 이는 명백히 그를 포섭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였다. 그는 내게 북한 관리들의 서투른 공작과 자신을 협박하려고 친척들을 이용한 수법에 정나미가 떨어졌다고 말했다.

 이듬해인 73년에는 북한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다. 그들은 방문기간 동안 박정권 아래에서 10여년동안 진행돼 온 서울의 발전상과 변화, 근대화를 관찰하는 잊지 못할 기억들을 갖게 됐다. 이때 벌어진 북한 대표단과 이범석 대표가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남아 있다. 이 일화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었을만큼 인구에 회자됐다.

 북한측 대표는 판문점에서부터 이 수석대표와 같은 자동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북측대표는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수많은 차량과 대한민국의 생동감 넘치는 현대화의 현장들을 휘둥그레진 눈으로 바라본 게 분명했다. 이는 대부분 거리가 텅비어 있고 내세울만한 자랑거리도 드문 북한의 실정과는 극명히 대비됐다. 그렇지만 북한정권은 평양에 특별한 손님들이 도착할 때면 방문객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를 마련하는 조직력을 과시했다. 북한 대표단장은 이범석 대표에게 『대단하신 분들이군요. 우리에게 발전상을 보여주려는 뜻은 좋지만, 저토록 많은 차량을 어디서 다 불러모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범석 대표는 즉각 『글쎄요, 무척 힘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저 건물들을 여기로 옮기는 일은 훨씬 더 힘들었지요』라고 대답했다.

 운전사와 그 옆좌석에 타고 있던 경호요원도 이들의 대화내용을 들고 매우 재미있어 했다. 이 이야기는 이내 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83년 서울을 방문한 조지 슐츠 당시 미 국무장관이 이범석 장관과 회담을 가진 자리에서도 이 이야기가 등장했다. 당시 나를 포함한 미국 대표단과 한국 대표단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이장관의 열렬한 팬이 된 슐츠 장관은 그에게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고 물었다. 이장관은 그러나 이 질문에 대답할 필요조차 없었다. 한국 대표단의 두 사람이 즉각 『맞습니다, 그건 사실이예요』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그말을 듣고 한바탕 신나게 웃었다.

 81년 여름 내가 주한 미 대사 신임장을 제출할 당시 이범석씨는 통일원 장관이었다. 69년 통일원 창설 무렵부터 통일원 최초의 외국 고문을 지낸 나는 이 부처의 역할을 익히 알고 있었다. 물론 나는 이장관을 방문했고, 양쪽 가족들도 곧 만났다. 그는 통일원 장관에서 물러난 뒤 청와대로 자리를 옮겨 몇달동안 비서실장을 지냈다. 그리고 82년 5월의 개각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그를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이 덕분에 우리 부부는 이범석 장관부부와 더 잦은 만남을 즐길 수 있었다.

 나는 82년 9월20일 외무장관 공관에서 열린 만찬을 생생히 기억한다. 이범석 장관과 그의 아내의 상징처럼 굳어진 몇몇 이미지들은 내 가슴 깊은 곳에 새겨져 있다. 정원이 새롭게 단장됐던 공관은 언제나 개방돼 있었다. 공관이 산뜻하게 변신한것은 이범석씨가 76년부터 80년까지 4년동안이나 인도주재 대사를 지낸 경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칼럼니스트들은 정부가 그를 인도로 보낸 것은 시간낭비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인도 대사직을 맡기에는 너무 똑똑하고 재능도 많았다. 그는 인도대사 시절 그곳 북한 대표들과 접촉 라인을 구축할 수 있었고, 대화채널을 유지했다.

 공관에서 나눈 대화는 외교적 관심사같은 딱딱한 내용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한국이 직면한 문제들에 대해 자유롭고 솔직한 대화를 나누었다. 청와대가 운영되는 스타일에 대해서도 무조건 긍정적으로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이장관은 청와대에서도 4∼5개월 정도 비서실장을 지냈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지를 잘 알았다.

 9월20일의 만찬에서는 주한 아룬다티 고스 인도 대사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매력이 넘쳤으며 성격이 무척 쾌활했다. 나와 아내는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순간부터 그녀에게 매료됐다. 이장관 부부는 고스 대사와 뉴델리에서부터 친하게 지냈다. 이장관 부부는 특히 여성이 인도처럼 큰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에 대해 대단히 흡족해했다.

이장관이 이날 만찬에서 부인을 위한 건배를 제의한 것은 전혀 놀랄일이 아니었다. 그는 남편들이 대사관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내조하고 있는 많은 외교관 부인들에게도 건배를 제의했다. 그는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고스 대사와 같은 여성들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건배를 계기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와 문화에 있어서의 여성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장관 부인은 여성에게 합당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또 제대로 평가하지도 않는 한국적 풍토는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장관도 공감을 표시했다.

 이후에도 우리 4명은 수시로 한국 여성이 처한 문제들에 대해 얘기했다. 나는 박사과정을 지도했던 이경숙 여사가 국회 외무위 의원이 된데 대해 항상 자부심을 가졌다. 그녀는 한국 사회에서 막중한 자리에 오른 선구적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지금 숙명여대 총장을 맡고 있다.

 이범석 장관 부부와 잦은 접촉을 가질 수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 부부에게는 다행스런 일이었다. 우리는 그들을 정말 소중하게 생각했다.

 예를 들어 우리 네 사람은 82년 10월 부산 유엔 묘지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내려갔다. 이번 행사에는 한국전에 참전해 그곳에 묻힌 장병들을 둔 다른 유엔 회원국 대표들도 참석했다. 나는 비행기 안에서 이장관의 옆 좌석에 앉았고, 세니와 여사도 이장관 부인과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모든 행사를 마친 뒤에도 이장관 부부의 호텔방에서 장시간 대화를 나누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12월에는 주말을 이용해 제주도로 놀러간 적도 있다. 그 여행은 정말 오붓한 가족 나들이였다. 그 즈음에는 우리 네사람이 자식들과 그들의 미래에 대한 기대, 그리고 가족과 관련된 앞으로의 계획등을 털어놓고 의논할 만큼 가까운 사이였다.

 이장관과 나는 당시 한미 관계를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는 새로운 변화들의 의미를 짚어보기도 했다. 우리는 전두환정권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던 반미 감정에 대해 우려하기도 했다. 이장관은 이 문제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진정한 친구였고, 한미 관계 발전을 열렬히 기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 외무장관으로서 필요한 초연함은 잃지 않았다. 우리 둘 사이에는 신념과 믿음, 그리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일종의 양해가 있었다.

 나는 그가 대통령을 수행하고 캐나다와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 한국대표단을 이끌고 유엔을 들를 때, 아니면 외무장관 자격으로 순방에 나설 때, 그리고 다른 볼 일로 외국에 나갈 때마다 늘 공항까지 달려가 배웅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외국 방문길에 나설 경우 서울의 모든 외교관들이 대통령을 배웅하기 위해 공항에 나가기도 했다. 이장관은 그러나 내게 농담조로 『딕시, 나는 당신이 「나」를 배웅하기 위해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나는 그가 서울에 도착할 때도 공항에서 그를 맞이했다. 한국 언론과 친구들도 우리 두 사람이 보통으로 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눈치챌 정도였다.

 내가 그처럼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게된 것은 큰 기쁨이었다. 우리의 돈독한 관계는 83년 소련기에 의해 대한항공(KAL) 007편이 격추된 사건이 발생한 이후 빛을 발했다.

 사건이 발생한 그날 우리는 한미 동맹 30주년을 기념하는 한 학술회의에서 헤드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소련 전투기가 무장을 하지 않은 한국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했다는 뉴스는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전해졌다. 이 여객기에는 미국인 탑승객도 많았다.

 이후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83년 10월9일에는 미얀마 랑군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이 테러로 세계는 유능한 외교관이자 훌륭한 국제 신사(이장관)를 잃게 됐고, 한국민들도 유능한 최상급 공직자들을 떠나 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물론 나도 정말 소중했던 친구들을 여의는 쓰라린 고통을 당했다. 나와 아내 세니가 추도식에서 눈물을 감출 수 없었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세니는 추도식 이후에도 꾸준하게 이장관 부인과 그 가족을 방문했다. 이장관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랑은 우리 부부도 존중할 만큼 각별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느 미국인, 또는 한국인들과는 다른 점이 많았다. 그는 사려가 깊었고 조그만 제스처일지라도 언제든 부인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이처럼 금실이 좋았던 이장관 부부는 정말 천생연분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를 추도하는 행사에 빼놓지않고 참석했다.

 나는 지금도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이장관 가족을 만나고 있다. 이장관 부인도 미국에 살고 있는 자녀를 방문할 때면 어김없이 우리집에 전화연락을 하고 있다.

 나는 북한을 방문한 경험이 없다. 공식초청을 받은 적도 있고 한번은 방북하는 미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오라는 제의를 받은 적도 있었지만 말이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랑군의 구름」은 북한쪽에 머물고 있다. 랑군 테러가 이장관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한국은 앞으로도 세련되고 각별한 나의 친구인 이범석 장관같은 정치인들을 계속 배출해내는 한 미래에 대해 자신을 가져도 괜찮다고 생각한다.<워커 전 주한 미 대사/번역=이종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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