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기업들 정리도 부실/채무·채권·인수자 이해줄다리기/재벌에 넘겨주면 특혜시비 부담/「주인없는 경영」 장기화할 조짐대형 부실기업들의 「주인찾아주기」가 난항을 겪고 있다. 전대미문의 재벌 연쇄몰락으로 우성 건영 한보 삼미 진로 대농 한신공영 등 거대기업들이 「부실기업명단」에 등록됐으나 이들에 대한 정리는 채권은행과 인수희망업체, 당사자간 「삼각줄다리기」로 공전만 거듭하고 있다.
8일 금융계에 따르면 이날 예정됐던 한보철강 1차 공개경쟁입찰은 신청자가 하나도 없어 자동유찰됐다. 지난해 5월 이미 결정됐던 한일그룹의 우성건설인수는 인수조건을 둘러싼 채권은행단과 한일그룹간 막판마찰로 15일 채권단회의에서 1년2개월만에 「백지화」할 위기에 놓여 있다.
「부도유예협약」이란 새로운 부실기업정리모델이 적용됐던 진로와 대농은 3개월의 유예기간이 끝나도록 주식포기각서를 내지않아 이달 및 내달말 열릴 채권단 회의에서 유예혜택을 박탈당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건영 한신공영 등도 제값을 부르는 인수희망업체가 없어 「주인없는 경영」이 장기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부실기업정리가 이처럼 더딘 진척을 보이는 이유는 우선 매물의 덩치가 워낙 커 인수여력이 있는 업체가 별로 없다는 데 있다. 지금처럼 기업 자금사정이 나쁜 상황에서 부채규모가 조단위에 달하는 「빚더미」기업을 떠안을 곳은 결국 몇몇 재벌 외엔 없다. 그나마 부실기업들은 한결같이 ▲아무나 맡기 어려운 대형 장치산업(철강 특수강)이거나 ▲극심한 경기부진업종(건설 유통)들이어서 인수가능업체의 폭을 더욱 비좁게 하고 있다. 한보가 결국은 현대로 넘어갈 것으로 예상되고 삼미인수에 현대와 포철이 뛰어들었으며 건영에 한화와 제일제당이 군침을 흘리는 것도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러나 초대형 재벌이기 때문에 인수 자체가 더 어려워진다는 지적도 있다. 한 시중은행 간부는 『한국적 정서에서 재벌의 부실기업인수는 하나의 특혜로 비춰진다. 6공말 제2이동통신 사업자선정 파동을 생각하면 재벌의 부실기업인수는 정권말기인 지금 상당히 부담스러운 결정』이라고 말했다.
이는 부실기업정리에 임하는 정부의 태도에서도 확연히 입증된다. 과거 국제그룹 해체나 집단적 부실기업정리(산업합리화) 과정의 「주연」을 담당했던 정부는 현재 『주거래은행이 판단할 문제』라며 적어도 표면적으론 「완전한 국외자」로 빠져 있다.
금융기관보다는 기업의 「우위」에 있다는 점도 부실기업정리를 늦추는 요인이다. 현재 부실기업이 집중돼있는 제일·서울은행은 경영정상화와 국제신용도 회복을 위해선 이들 부실기업의 조기매각이 불가피한 실정이나 인수선상에 떠오르는 기업들은 『급할게 없다』는 입장이다. 우성그룹을 넘겨받으려는 한일그룹이 막바지에 인수조건완화를 주장하고 현대가 한보인수에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부도유예협약 역시 「흑자도산방지」여론에 밀려 급조됐으나 정작 해당기업은 의무이행은 마냥 뒤로 미루고 있어 협약의 허점을 드러낸채 금융기관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만약 부실기업정리가 조기에 매듭지어지지 못하고 장기화한다면 금융과 산업은 물론 국가경제 자체가 부실화할 것이라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이성철 기자>이성철>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