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학습지·개인교습 등 남들 다하는데 안할수도 없고/남편월급으론 엄두도 못내/보험설계사로 백화점사원으로…/은행에서 목돈 대출까지『그놈의 과외비 때문이죠. 생각같아선 집에 있으면 좋겠지만 남들은 다 학원에 보내고 개인과외를 시키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있나요』
파출부 일을 나가는 차모씨(41·경기 고양시)는 두 아들을 학교에 보낸 직후인 상오 9시께 서둘러 집을 나선다. 상·하오 2시간씩 남의 집을 돌며 빨래와 설거지 등을 해주고 한달에 40만원을 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아이들 과외비를 충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소업체 사무직원인 남편(44)의 월수입은 한달 120만원. 빠듯하지만 그럭저럭 4식구 생활비와 학비는 댈 수 있다. 그러나 과외비는 엄두도 못낼 형편이다. B중학교와 B초등학교에 다니는 두아들의 학원비가 61만원. 남편의 월급 절반이 그냥 날아가는 꼴이니 남편에게만 의존했다가는 빚을 져야 할 판이다.
애들 과외는 시켜야겠고 남편의 월급은 빤하고 해서 파출부로 나섰다. 벌써 3년전 부터다. 처음 창피한 생각도 들었지만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조금은 위안이 됐다. 『내가 살고 있는 H아파트 310동 같은 라인 30가구중 4가구 어머니가 애들 과외비 때문에 파출부 일을 하고 있어요』
중1인 큰아들은 한달에 25만원을 내고 주 3회 국어 영어 수학 과학과목을 가르치는 학원 종합반에 다닌다. 따로 6만원을 들여 영어 학습지 과외도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인 둘째 아들은 컴퓨터와 미술학원에 다니고 학습지 과외를 하는데 월 30만원이 들어 간다.
학원비로만 전체 생활비의 절반 가량이 들어가 버리니 개인과외는 꿈도 꿀 수 없다. 남들처럼 개인과외를 받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차씨의 발길은 가벼울 날이 없다.
『바깥일에만 신경을 쓰는 남편은 학원비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가는 줄 몰라요. 알면 깜짝 놀랄 걸요. 그래도 아직은 애들이 어려 다행인데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과외비를 어떻게 대야할지 걱정이에요』
차씨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살고 있는 26평짜리 집 한채와 조그만 땅이 있어 애들 과외비만 안 들어가면 그럭저럭 살 만한데… 어떻게든지 애들이 대학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좋겠지만 그것도 확신할 수는 없잖아요. 그저 남들한테 처지지나 않았으면 하는 거지요』
고1·중2 두딸을 둔 황병화씨(43·서울 노원구 중계1동)도 과외비 때문에 슈퍼마켓 주부사원으로 나섰다. 건설사 하청을 받아 지하수 개발 일을 하는 남편(49)의 월수입은 약 300만원. 차씨집 보다는 형편이 낫지만 그래도 과외비 때문에 쪼달리기는 매한가지다. Y여고에 다니는 큰 딸의 과외비는 중학교 때만 해도 남편월급으로 견뎌낼 수 있었으나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경기침체로 남편의 수입도 뚝 떨어졌다. 애들 과외를 시키려면 조금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황씨는 그래서 올 1월부터 집근처 M슈퍼마켓에서 주부사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황씨네도 과외비로 들어가는 돈이 차씨네와 마찬가지로 남편 월급의 절반 가량이나 된다.
큰딸한테는 종합반 학원비 28만원, 수학 개인과외비 40만원, 미술학원비 30만원 등 총 98만원이, J중에 다니는 작은딸한테도 학원비 22만원, 영어 그룹과외비 13만원, 미술학원비 10만원이 들어 간다. 두 딸 과외비로 지출되는 돈이 월 150만원에 가깝다. 황씨는 매일 상오 6시30분부터 6시간씩 일하고 한달에 65만원을 받는다.
『처음 일을 나올 때는 막연히 애들 과외비는 충당할 수 있겠지 했는데 막상 한달동안 일하고 받은 돈이 과외비의 절반에도 못미쳐 허탈했어요. 그렇지만 최소한 보탤 수는 있지 않느냐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아요』
황씨는 같이 일하는 20여명의 주부들이 모두 비슷한 사정이라고 말했다. 취재팀이 『정말 대부분이 그런 겁니까』라고 놀란 표정을 짓자 『애들 돌보기도 바쁜데 집안이 넉넉하면 뭣하러 일 나오겠어요』라고 반문했다.
황씨는 심지어 순전히 과외비로 쓰기 위해 은행에서 목돈을 대출받는 경우도 있다고 귀띔했다. 『남편이 대기업체 중견 간부인 친구(43)도 은행에서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데 올해 딸이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1,000만원을 대출받았어요. 국·영·수 과목중 2과목에 예능과목 하나를 추가해 과외를 하면 150만원이상이 매달 필요한데 회사 임원이라도 월급 가지고는 힘들지 않겠어요?』
과외비 압력이 어머니들을 일터로 내몰고 있다. 취재팀이 만난 30대 후반∼50대 초반의 파출부 백화점사원 보험설계사 카드배송원중 90% 이상이 「과외비 때문에」라는 대답을 선뜻 내놓았다. 빠듯한 생활비와 학비 조달에도 등이 휘는 남편에게 과외비 부담까지 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엄마들까지 나서고 있는 것이다.
남편이 국내 유수의 S그룹 부장으로 있는 김모씨(43)는 초등학교 6년생인 딸에게 플룻 바이올린 수영 영어회화 등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암웨이사의 다단계판매원으로 일하고 있다.
심지어 주부가 자녀의 과외비 조달을 위해 결혼상담소나 이벤트 업체를 통해 매춘을 하다 경찰단속에 걸려 충격을 던지기도 했다. 중3 딸을 둔 오모씨(38)는 『밑빠진 독에 물붓기인 첼로나 바이올린 등의 예능과외를 시키기 위해 몸까지 판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 말할 정도이다.
『오죽 답답하면 내가 이런 일을 하겠습니까. 과외비로 인한 가계부담이 과중한 정도가 아니라 사람을 잡습니다』 용역회사인 국제정보통신에서 카드배송일을 하며 하루 7시간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주부 김모씨(48)도 같은 하소연이었다.
◎“과외야말로 가정파괴 주범”/수업료 더내도 좋으니 학교교육질 높여야
『우리나라 입시정책이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를 멀어지게 해요』
과외비를 벌기 위해 3년전부터 S생명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고 있는 주부 정모씨(45)는 과외야말로 가정파괴의 주범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원이다 개인과외다 애들에게 막대한 투자를 하는데 성과가 나지 않으면 부모 마음이 조급해져요. 애들은 애들대로 부모 기대에 못미치면 당장 말수가 줄고 나중에는 반발심까지 갖게 됩니다. 애들과 부모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자연히 애들 문제로 남편과 자주 말다툼을 하게 돼요』
그는 친구(45) 부부가 고3 아들의 성적문제로 자주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애가 10월에 가출했다가 수능시험 직전에 돌아왔다고 소개했다. 과외를 시키는 등 헌신적인 투자를 하는데도 자녀의 성적이 떨어지면 부모가 서로 책임을 미루게 돼 결국 부부싸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부모 자식간에 대화단절을 막기위해 TV를 보면서 토론을 하라는 것도 책상머리 교육학자들의 얘기일 뿐이에요. 애들이 피아노 바이올린 수영 컴퓨터 등을 배워야하고 국·영·수 과외도 해야하는데 어디 토론할 시간이 있나요. 고등학생이 되면 얼굴보기도 힘들어져요』 정씨는 『교육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꼬집었다.
형편이 넉넉치 않더라도 학부모들은 과외를 시킬 수 밖에 없고 성적이 오르고 안오르고는 나중 문제다.
K생명에서 보험설계사 일을 하는 주부 박모씨(39)는 학부모들의 심정을 이렇게 대변했다. 『애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인데 애들이 원하면 못먹고 못입더라도 어떻게든 과외비를 대야지요. 나중에 과외를 못받아 잘못됐다고 하면 속이 편하겠어요. 형편이 넉넉치 않아 과외를 못시키는 부모들은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어요』
과외를 시키고 있는 학부모 대부분은 『학교 수업만 갖고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게 현실』이라고 입을 모았다. 『명문대에 수석입학한 학생들이 곧잘 학교수업에만 충실했다고들 말하는데 곧이 곧대로 믿을 학부모가 누가 있겠어요. 대개는 엄청난 돈을 과외비로 퍼부었을 거예요. 교육정책 당국자들이 특별한 학생들만 내세워 교과서적인 얘기를 하면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카드배송일을 하는 주부 김모씨(48)의 불만과 불신은 깊었다. 『과외는 서민층 갈등의 근원이예요. 학교 수업료를 더 내도 좋으니 학교 교육의 질을 높여 제발 과외를 안받도록 해 줄 수는 없나요. 또 입시제도는 왜 그리 자주 바뀌는지 모르겠어요』
◎학원수강·개인과외비 연간 6조7,000억원
올해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초·중·고교 학생의 연간 사교육비는 20조원을 초과, 교육부 예산 15조원보다도 5조원 가량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교육개발원의 94년 집계 당시 파악된 사교육비 17조4,376억원의 대국민총생산(GNP) 비율 6.03%를 올해 GNP에 맞춰 추정한 액수다. 이중 교재구입비 하숙비 교통비 등을 제외한 학원수강 및 개인과외비 지출분만도 전체의 33.5%, 6조7,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서울시내 중·고교 학생들이 1년간 일반학과목 과외비용으로 지출한 액수만도 1조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 교육청이 지난 4월 한달동안 학원수강을 하거나 개인지도를 받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 이들이 지출한 과외비는 969억8,000만원이었다.
이 가운데 고교생 과외비가 461억 8,000만원이었고 중학생 과외비는 이보다 많은 508억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과목별로는 수학이 347억원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영어 279억원, 국어 129억원 순이었다. 교육부는 또 최근 초등학교의 영어 조기교육을 앞두고 영어과외를 받는 초등학생이 전국적으로 53만명에 이르며 이에 드는 비용도 연 3,500억원을 넘어섰다고 밝혔다.<이진동·이상연 기자>이진동·이상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