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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1/한국무용(한국의 예맥: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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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1/한국무용(한국의 예맥:12)

입력
1996.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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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등 납·월북 창작춤 한때 단절/조택원,최승희와 우리춤 현대화 선구역/50년대공백 김백봉·송범·임성남이 메워/전통춤은 한성준이 집대성… 한영숙·강선영등 배출춤추기를 좋아하는 우리 민족은 마당과 실내 어디에서나 질펀한 즉흥춤을 즐겨왔다. 그러나 정작 요즘 무용공연에서는 관객확보가 가장 큰 문제이다. 수많은 대학무용과와 국·시립 무용단등 춤판의 덩치는 커졌지만 속을 채워나가는 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이다.

한국무용의 맥은 궁중이나 기방에서 전해 오던 전통무용, 일본유학파가 도입한 신무용을 이어받은 창작무용의 두 갈래로 크게 나뉜다. 최근 한국무용가들은 양쪽을 모두 익히고 있으나 활동영역의 구분은 여전히 존재한다.

처음 「신무용」이라는 용어와 실체가 선을 보인 것은 1926년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석정막)의 경성공연이었다. 이를 계기로 최승희 조택원이 그의 문하에 들어가 1930년대 한국 근대무용이 뿌리를 내리게 됐다. 이들은 이탈리아인 로시를 사사한 이시이 바쿠를 통해 갓 태동한 이저도라 덩컨류의 현대무용을 배운 셈이지만 곧 조선춤의 현대화작업으로 선회했다. 국내무용가들은 이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약간 후대에 선구적으로 현대무용을 했던 함귀봉같은 이들이 광복후 월북함으로써 신무용이 현대무용으로 계속 발전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최승희 조택원과 함께 초기 신무용의 3인방으로 일컬어지는 이는 배구자. 일본 덴가쓰자(천승좌)에서 곡예 춤 노래를 익혀 1928년 처음으로 신무용공연을 했고 1929년 최초의 개인무용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는 기생이 아닌 최초의 직업무용가로 기록되고 있으나 예술성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며 일찍 일본에 귀화하는 바람에 제자도 남기지 못했다. 최고 인기를 구가했던 최승희는 미국 유럽 중국등을 순회했으며 46년 월북했다. 손아래 동서이자 제자인 김백봉이 남한에서 큰 맥을 형성했다.

전통무용은 명고수이기도 했던 한성준의 집대성 덕분에 현재까지 가장 성하게 전해 내려온다. 1874년생(추정)인 그는 7세때부터 외조부 백운채에게서 춤과 북을 배웠고 전국을 유랑하며 소리꾼 놀이패광대 무당 기녀등을 만나 민속춤으로부터 궁중정재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용을 익혀 40여 가지의 전통춤을 정립했다. 그는 1934년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 본격적으로 제자를 양성해 냈다. 손녀인 한영숙과 강선영등 제자들이 후에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지정됐다. 최승희 조택원도 잠시 그에게 배운 적이 있다.

처용무와 같은 궁중정재는 이왕직아악부에서 국립국악원으로 맥을 잇는다. 명무 김보남, 국악을 아우르는 김천흥이 꼽히는데 그 제자들이 낙학궤범 진연의궤등에 기록된 홀기(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를 참조하여 재현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광복을 맞자 무용계도 조선무용건설준비위원회니 조선무용예술협회니 하는 조직을 만들어 일제청산등을 부르짖었다. 지성파무용가 조택원 방정미(예명)등은 해외로 나가게 되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부분의 기성무용가들이 월북하거나 피랍되는 혼란을 겪게 된다.

공백기라고 할 수 있는 50년대에 한국 무용계를 평정한 인물이 김백봉 송범 임성남이다. 김백봉은 최승희와 함께 월북했다가 다시 월남, 부채춤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여 극찬을 받았으며 무용연구소와 경희대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해 냈다. 림성남은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본격적인 발레를 선보였고 송범은 발레 현대무용을 거쳐 한국무용으로 귀착했다. 국립무용단과 무용협회등을 주도적으로 이끌며 선배들이 사라진 평야에 무용계를 재건한 이들은 60∼70년대까지 넘볼 수 없는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온 것은 대학에 무용학과가 생기면서부터. 58년 서라벌예대, 63년 이화여대, 64년 한양대, 66년 경희대등에 무용학과가 개설되기 시작했고 대학교수들이 70년대의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 최근까지 활발하게 활동중인 사람들이 많다. 창무류라는 독특한 스타일을 만들어 낸 김매자가 이화여대와 창무회에서, 호흡을 중시한 움직임을 정립한 배정혜가 선화예고와 ㄹ무용단에서, 독특한 창작세계를 구사했던 문일지가 예원학교와 서울시립무용단등에서 활동하며 제자들을 양성했다.

한편 천시받기 일쑤였던 전통무용도 70년대부터 급부상, 인기를 모으는 추세이다. 지방에서 전통춤사위를 이어오던 이들이 발굴되었고 승무 살풀이 태평무 처용무 진주검무 승전무등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전승작업이 활발해졌다. 경기류인 한성준류 외에 호남류 이매방의 승무 살풀이가 가장 성한 편이다. 현존 최고의 명무로 일컬어지는 이매방은 계보도 상의 제자들 외에 송수남(단국대) 김명숙(이화여대) 오률자 김운미(이상 한양대) 이길주(원광대) 최은희(부산여대)교수와 이로연(이노연·부산시립무용단)등 셀 수 없는 무용가들을 가르쳤다. 중요무형문화재 발탈의 보유자였으면서 각종 민속예술에 능했던 이동안도 김백봉 김백초 최현 정승희 문일지등 많은 무용가를 길러냈다.

전통무용은 역시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중심으로 맥이 이어지고 있다. 문화재 지정은 춤을 보존하는 데 큰 의의가 있으나 즉흥적인 우리 무용의 멋을 살리기에 적합한 방식은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또 기껏해야 100년의 역사를 가진 한성준의 춤만 해도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종목들은 별로 추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작용으로 꼽힌다.

한편 창작한국무용의 경우 최근 발레나 현대무용에 비해 그 비중이나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현대적인 표현력과 한국무용의 그윽한 맛을 조화시키는 데에는 프로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상황이다.<김희원 기자>

◎북으로간 무용가들/최승희 무용가동맹위원장 맡다 숙청/이석예·장추화·함귀봉도 북서 활동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용계는 완전한 세대교체를 겪게 된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무용가들 중 60∼70명이 월북하거나 납북된 것이 큰 이유다. 이중에서도 중요하게 꼽히는 무용가들이 최승희와 제자인 이석예 장추화, 함귀봉과 제자 최가야, 정지수 한동인등이다.

최고의 인기스타였던 최승희는 북한에서도 김일성정권의 대대적 환영과 후원 속에서 활동했다. 그는 일제때 독무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했으나 북한에서는 장막무용극을 주로 선보였다. 무용가동맹의 위원장을 맡는등 60년대까지 절대적인 지위를 누렸으나 70년대 중반 이후 숙청당한 것으로 전한다. 지난해 12월 귀순한 북한무용가 신영희는 그의 2대 제자, 즉 제자의 제자로 알려졌다.

이밖에 장추화는 개성에서 별도로 무용연구소를 내 제자들을 가르쳤고 이석예는 발레로 방향을 바꿔 남편 정지수와 함께 활동했다. 정지수는 이름을 날렸던 발레리노였다.

일본에서 유학하고 뷔그만 계열의 현대무용을 선보였던 함귀봉 역시 무용가동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이론·평론가로서의 활동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광복직후 서울발레단을 설립, 활동했던 발레의 선두주자 한동인과 함귀봉의 제자 최가야는 북한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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