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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의 정치를 풀어야(최상룡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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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마의 정치를 풀어야(최상룡 칼럼)

입력
1996.0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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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곧잘 정치에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거의 같은 강도로 정치는 현실이라고 잘라 말한다. 둘 다 의미가 있다면 모름지기 정치인은 뚜렷한 목표와 철학을 가지되 현실, 즉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강요된 이데올로기에 맞춰 현실을 조직개편했지만 냉전체제가 무너진 오늘의 세계에서는 주어진 이념이 아니라 현실과 일상 속에서 바람직한 정책이나 비전을 찾아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냉전과 탈냉전의 과도기에서 국가의 중심축을 설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역사의 방향을 분명히 읽어야 한다. 한반도 냉전의 붕괴는 시간문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냉전후의 한반도의 통일국가상을 분명히 설정하고 우선 대한민국 내부부터 통합하고 가용자원을 극대화해 나가는 예지를 발휘하는 것이다. 도대체 개혁이란 무엇인가. 언뜻 보아 개혁은 현상유지를 지향하는 보수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나 체제의 기본틀 속에서 건설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건전한 보수세력의 중심가치가 될 수 있다. 선거용 색깔논쟁은 한심하기 짝이 없고 지도세력을 개혁과 반개혁으로 나누는 이분법도 현명치 못하다. 국민이 지지하는 개혁을 추진하면 공개적인 반개혁세력은 설 땅을 잃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박수가 지지로 이어지려면 개혁과 현실 사이의 간격을 메우는데 정치의 최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이를테면 실명제의 딜레마가 그 좋은 예다. 실명제의 당위성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실명제 실시로 자금사정이 나빠지면서 중소기업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 현실을 부정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 엄연한 딜레마를 풀어주는 일차적 책임이 정치에 있다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다면 실명제 실시의 도덕적 우위성을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그 실명제가 중소기업에 끼친 장애요인을 제거하는 정책이 급선무이다. 「중소기업청」이라는 기구의 창설만이 아니라 그것이 제 기능을 하여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이 뿌리내리지 않은 「기형선진국」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움츠러든 것도 사실

그 다음 전·노 전직대통령사건만 해도 그렇다. 5·18사건과 개인의 부정부패를 물어 두 사람을 구속하는 것 자체를 두고 공공연하게 반론을 펴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나라가 뒤숭숭해지고 그에 따라 경제의 많은 부문이 움츠러든 것도 사실이다. 새뮤얼슨의 얘기대로 경제는 연약한 꽃과 같은가 보다. 따라서 경제를 중심으로 국가의 운영을 정상화하려면 하루빨리 「화의 정치」로 물꼬를 터서 나라 안팎으로 정부와 국가의 신용을 재창출해 나가야 한다. 설령 현정부가 도덕성에 자신이 있고 역사 앞에 부끄러움이 없다 하더라도 박정권이래 군사권위주의정권 30년의 역사과정에서 비리와 부패도 많았지만 업적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다양한 기득권 세력 가운데는 산업화 추진세력도 적지 않고 소신있는 반공보수세력도 많다. 적을 최소화하고 정치사회 내부를 통합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일진대 기득권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정부를 위해서나 나라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 정부는 하루 빨리 5, 6공사건을 매듭짓고 지도층의 총반성과 함께 총화합으로 정치를 풀어 나가야 할 것이다.

○최악의 동족 증오

산업화와 민주화 다음으로 제기되는 통일문제도 냉정히 다뤄 나가야 한다. 통일의 당위성에 어느 누가 반대하랴. 그러나 현실은 통일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8·15이후 최악의 근친증악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대통령이 아무리 당당한 제안을 해도, 통일원이 아무리 합리적인 정책을 내놓아도 북한으로부터 성실한 화답을 기대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이런 과정에서 북한은 식량위기, 고위층 자제의 망명 등으로 체제가 흔들리고 있는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때 우리와 주변국이 너무 북한을 몰아 붙이면 어떻게 될 것인가. 소규모 기습전이나 이른바 온건한 수준의 「모험」이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면 남한은 대규모의 혼돈과 위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것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에 대한 열망보다, 아니 바람직한 통일을 위해서라도 일단 남북한의 평화공존상황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북한은 그들의 최우선 순위의 정책목표가 체제유지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들에게 불리한 통일보다는 남북평화공존상황을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가 남북한관계를 개선하고 북한과의 평화공존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제시하는 길 뿐이다. 그렇다면 식량난문제, 남북경협문제, 미·일의 대북정상화문제 등에 대해서도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실용적 융통성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정치의 세계에서는 실명제나 5, 6공 청산이나 통일과 같은 당위론도 다양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4,000만 국민이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맞게 조정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고통스러운 딜레마로 이어지는 현실정치에서는 실현가능한 최선, 즉 「차선」이상의 해법을 찾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는 예술가나 도덕적 지도자처럼 만인의 사랑이나 존경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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