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범낙인 불구 세계자치 이룩/2차대전후 최악 민족분쟁 주도 “절반의 승리”지난 14일 파리평화협정 조인으로 보스니아 내전은 끝을 맺었다. 25만명의 희생자와 200여만명의 난민을 양산하며 43개월동안 계속된 이 내전의 중심에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계 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가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스니아 내전은 「카라지치의 전쟁」이었다. 카라지치의 공식직함은 민족주의를 표방한 세르비아 민주당 당수. 89년 선출된 뒤 계속 이 자리를 지켜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주도해온 전쟁을 끝맺기 위한 협상에 참석하지 못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혐의로 유엔에 의해 전범으로 수배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전범으로 수배됐으나 카라지치는 패배자가 아니라 「절반의 승자」이다.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를 세르비아 공화국및 몬테네그로와 합쳐 대세르비아를 건설한다는 목표를 성취하진 못했지만 평화협정에 따라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자치공화국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카라지치의 전쟁은 구유고 연방의 분열에서 비롯됐다. 티토의 카리스마가 사라지고 냉전종식으로 구소련 블록이 해체되자 크로아티아가 91년 6월, 보스니아는 92년 2월 각각 독립을 선언했다. 졸지에 소수민족으로 전락한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일방적 독립선포에 반발, 회교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카라지치는 개전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회교도를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의 지배를 받아들일 수 없을 뿐이다』
카라지치는 전쟁초부터 기세를 올렸다. 구유고 연방군이 남긴 무기와 세르비아 공화국의 지원을 업고 한때 보스니아 영토의 70%를 석권했다. 그러나 서방이 개입하면서 상황은 변했다. 92년 5월 경제제재가 실시되자 후원자였던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공화국 대통령이 그에게 등을 보이기 시작했다. 지난 7월 크로아티아가 보스니아 정부와 연합, 대공세를 취하자 전세는 결정적으로 역전됐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공습은 세르비아계 거점에 괴멸적 피해를 줬다. 이처럼 세르비아계의 계속된 수세는 내전을 종식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11월21일 미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평화협정이 합의됐고 파리에서 조인식을 가짐으로써 끝을 모른채 계속될 것 같았던 보스니아내전은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카라지치에게는 「발칸의 히틀러」 「발칸의 도살자」등 악명이 따라 다닌다. 그러나 전쟁이 있기 전 그는 동시집을 4권이나 낸 문인이자 사라예보 축구팀의 주치의를 역임한 정신과 의사였다. 그런 그가 2차대전 후 최악의 민족분쟁을 연출했다는 것은 민족이란 이름 아래 다른 민족에 「악마」가 되기를 서슴지 않는 탈냉전기 민족주의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민족자결을 억압한 냉전의 종식으로 족쇄가 풀린 민족주의는 또다른 죄악의 씨앗을 뿌리고 있는 것이다.
카라지치의 앞으로의 운명은 알 수 없다. 평화협정에 따라 그는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서방은 그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 다수의 세르비아계가 그를 추종하고 있는 만큼 그는 「불안한 평화」의 한 축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배연해 기자>배연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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