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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산성/마르지않는「용담」엔 고구려혼 담겨(한문화 원류기행: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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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산성/마르지않는「용담」엔 고구려혼 담겨(한문화 원류기행:4)

입력
1995.11.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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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 2.4㎞ 흙·돌로 축성/송화강 굽어보며 1,500년/“지금껏 견고” 감탄 절로고구려산성 안에는 어김없이 작은 연못이나 샘이 있다. 산성은 평상시에 생활근거지였으며 유사시 장기전에 대비한 요새였으므로 물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편에는 산성연못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3대왕인 대무신왕 11년(서기 28년)에 한나라 요동태수가 침공했다. 좌보(3대 재상중 한 사람) 을두지가 왕에게 성에 들어가 적군이 지치기를 기다려 칠 것을 아뢰었다. 이른바 이일대로이다. 왕은 백성을 이끌고 위나암성(환도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했지만 수십일이 지나도 그들은 포위를 풀지 않았다. 을두지는 다시 『한나라 태수는 우리 성이 암석 위에 세워진 까닭에 샘이 없는 줄 알고 우리가 곤궁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같다』며 못 속의 잉어를 잡아 물풀로 싸서 술과 함께 보낼 것을 제안했다. 왕이 적장에게 『변변치 못한 물건을 보낸다』는 내용의 친서와 함께 그 선물을 보내자 한나라군사들이 즉각 물러갔다.

지린(길림)시 쑹화(송화)강변에 있는 용담산성에도 「용담」이라는 작은 연못이 있다. 해발 384의 용담산과 용담산성의 명칭은 이 연못에서 유래된 것이다. 산성내 서쪽 모퉁이에 있는 연못은 동서길이 52.8m, 남북너비 25.7m의 장방형이며 수심 9에 이른다. 연못바닥에는 샘구멍이 없다. 빗물이나 눈녹은 물, 돌틈에서 흘러나온 지하수가 연못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아무리 가뭄이 심해도 수위가 일정한 신기한 연못이다.

용담에서 남쪽으로 오솔길을 따라 250m쯤 올라가다 보면 또 하나의 신비한 연못이 나온다. 용담에서와 같이 둘레에 화강암을 쌓았으며 큰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아 한뢰라 불린다. 직경 10.8m, 깊이 3m의 원형에 연못벽은 수직이고 바닥이 평평하다. 이 연못은 감옥으로 쓰였다는 설과 물자저장고였다는 설등이 있으나 뚜렷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연간에 축조한 용담산성은 흙과 돌로 다져 쌓은 복합성이다. 성벽은 둘레 2,396m로 지세가 높은 곳은 낮게 쌓아 높이가 2m, 지세가 낮은 곳은 높게 쌓아 10m에 이른다. 동서남북 사면의 성벽 높은 곳에는 길이 20∼25m, 6∼9m 너비의 평평한 석대를 구축해놓았다. 이곳에서 출토된 니질홍색승문와가 망루가 있던 자리임을 알려준다. 또 연못을 중심으로 요와 금시대의 유물이 발굴돼 이 성터가 이후에도 계속 사용됐음을 보여주고 있다.

용담산성은 61년에 지린성 중요문물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일찌감치 공원으로 개발됐다. 시 외곽지역에 있지만 바로 산 아래에 철도역이 지나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에 아파트촌이 형성돼 항상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지린시에 사는 17만 조선족에게는 자존심을 지켜주는 유적지로 즐겨 찾는 교육의 장이기도 하다. 연못근처에서 만난 중국인교수는 『고구려인들이 쌓은 산성을 볼 때마다 그 견고함과 뛰어난 기술에 감탄하게 된다』고 말했다.<최진환 기자>

◎작가 메모/강정영씨

용담산성은 지린(길림)시에서 가장 큰 시민공원이었다. 산 중턱까지 대형버스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나 있고 공원내 광장에는 100여대의 차량을 수용할 수 있는 주차장시설과 음료수를 파는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300여m 거리에 용담이 있고 동남쪽에는 산정상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계단과 오솔길을 따라 10분쯤 올라가자 남쪽으로부터 도시를 감싸듯이 흘러오는 쑹화강과 주변 농가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산성주변에 울창하게 들어선 숲 아래로 수십미터의 자연암벽과 강물이 어우러져 첫 눈에 천연요새임을 알 수 있었다. 며칠전까지 내린 큰 비로 황톳빛으로 변한 쑹화강을 사이에 두고 녹색평야지대와 건너편 회색빛 도시의 선명한 대비가 인상적이었다.

□약력

▲47년 대구출생

▲계명대 회화과와 동대학원 졸업

▲국전 특선1회, 입선6회

▲현목우회 사무국장

◎고구려의 수·당 항쟁역사/70년동안 요동패권놓고 6차례 전쟁/나당연합군에 패망때까지 5번승리

고구려가 랴오둥(요동)일대의 패권을 놓고 수,당과 벌인 전쟁은 크게 보아 6차례. 수의 1차 침입이 있었던 598년부터 당에 의해 멸망한 667년까지 약 70년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고구려는 5번을 이겼다.

제1차 침략은 598년 고구려 영양왕이 요서지역을 공격하자 수의 문제가 수륙 30만의 군사를 일으킨 것. 하지만 육군은 홍수를 만나고 수군은 풍랑에 밀려 고구려땅을 밟아보지도 못했다. 2차 전쟁은 612년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군량과 물자수송을 맡은 인력까지 출동병력은 200만명을 넘었다. 이들은 평양성까지 진격했으나 고구려복병에 의해 저지됐고, 육군은 을지문덕장군에 의해 전멸당했다. 유명한 살수대첩이다. 수양제는 613, 614년 잇달아 3, 4차 침략을 감행했다. 3차 침략에서는 랴오둥을 함락시키는 순간 후방의 반란으로 돌아가야 했고, 4차 침략때는 고구려와 화친조약을 맺는데까지 성공했으나 지나친 국력소모로 수나라 붕괴의 결정적 원인이 됐다.

618년 수가 무너지고 새로 들어선 당은 돌궐등 주변국을 복속시킨 후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644년 당태종은 50만대군을 일으켜 요동성 백암성을 함락시켰으나 안시성싸움에서 패함으로써 전세가 역전됐다. 『더 이상 고구려를 치지 말라』는 당태종의 유언에도 불구하고 당은 647년부터 신라와 연합해 집요하게 공격, 결국 667년에 고구려를 무너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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