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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이유만으로…(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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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이유만으로…(1000자 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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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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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졸업 십년, 여자 친구들중 마지막으로 직업을 가지고 있던 친구가 얼마전 직장을 그만두었다. 새로 마련한 아파트의 불입금을 붓기 위해서 친구는 차로 한시간이 넘는 거리에 사시는 친정어머니를 매일매일 집에 오시게 하면서까지 직장생활을 해왔었다. 하지만 그녀는 둘째 아이를 낳고 과로끝에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위문하는 나에게 친구는 좀 쉬는 것일 뿐이라고 웃었지만 결국 출산휴가에다 병가까지 얻어야 하는 친구를 재벌 회사의 인사체계는 내쫓아버리고 말았다. 이로써 집에서 번역일이나 글쓰는 일을 부업삼아 하는 친구들 몇을 빼고 나의 친구들은 모두 가정주부라는 월급없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새삼 십년전 이맘때의 일이 떠오른다. 이력서를 들고 뛰어다니던 친구들과 나의 모습, 대학 4학년이 되고 졸업이 가까워 오면서 여자인 우리는 사회가 우리를 결코 반기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으로 아프게 깨달아야 했었다. 같은 대학 같은과를, 그것도 더욱 좋은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사회는 우리를 의붓딸 취급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깟 시련쯤 견뎌내기로 하고 발이 부르트도록 회사들을 찾아다니곤 했었다. 그건 사실 참기 힘든 모욕이기도 했지만 우린 얼마나 씩씩하게 그 역경을 이기고자 애썼던지.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는 이 모든게 소용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성비가 무너진다는 우려를 여러군데서 듣는다. 그건 거의 심각한 지경에 이른 모양이고 아직도 산부인과에서 둘째딸을 낳고 슬퍼하는 산모를 내가 직접 목격한 일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 묻고 싶다. 유아시절의 성폭력, 대학시절의 성희롱, 강간등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같은 대학을 나온다 하더라도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당당하게(?) 불이익을 주는 사회에서 당신은 정말 딸을 낳고 싶은가 하고. 식구가 불어 집이 좁아질 때마다 제일 먼저 자신의 책들을 박스속에 넣고 다시는 꺼내지 않으면서 여자들은 꿈을 잊어야 한다. 딸에게 큰 꿈을 가지라고 말하는 것도 이쯤되면 사실 회의스럽다. 무너지는 것은 단지 성비만이 아니다.<공지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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