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소군 고문단이 초안작성/번역작업 한달… 내가 최종종합/군사력등 우세 김일성 자신감/당시엔 “조국해방 성스런 과업”인식/“8월 북침설” 정보에 선제공격 서둘러「6·25사변」 「조국해방전쟁」 「한국전쟁」.
1950년6월 한반도에서 일어난 비극적 동족상잔의 전쟁은 남과북 또 국외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 각각의 명칭들이 암시하듯 6·25(편의상 이렇게 부르자)는 그 원인과 도발주체·외세의 역할·전개과정 등의 실체가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숱한 논쟁을 낳고 있는듯 하다.
그러나 6·25가 북한의 계획적 남침이라는 사실은 논쟁거리가 될 수 없는 너무나도 분명한 「역사적 진실」이다. 내가 오랜 망설임 끝에 남한방문을 결심한 것도 무엇보다 이같은 역사적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의무감을 빚처럼 느껴왔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북의 남침계획을 내손으로 작성한 장본인이긴 하지만 전쟁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 그일은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할 것이다.
다만 나는 내 증언이 군사적인 면에서 6·25가 어떻게 계획됐으며 또한 북한이 왜 이 전쟁을 도발했는지를 독자나 학자들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6·25 당시만해도 나는 많은 북쪽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이 전쟁이 분단된 조국을 통일하고 외세와 억압에 눌려있는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성스러운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전쟁은 오히려 한반도 분단에 결정적 쐐기를 박고 남북한간에 깊은 증오와 불신을 심은 민족에 대한 죄악이었다.
그러나 이 책임을 져야할 김일성은 그뒤 전쟁에 참여한 북한지도자나 장성들에게 전쟁의 책임을 뒤집어 씌워 차례로 숙청함으로써 전쟁을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했을 뿐이다.
내가 보안간부학교 군사담당 부교장에서 대좌(대령겸 준장급)계급을 단채 제2대 인민군 작전국장에 부임한 것은 48년 9월경이었다.
제1대 작전국장은 소련군 대위로 공병중대를 이끌고 독소 전쟁에 참여했던 황호림 대좌였다. 황호림은 자신의 화려한 경력에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던 탓인지 자신보다 나을 것이 없는 강건이 당시 총참모장인 것에 불만을 품고 강건과 말다툼을 벌여 쫓겨 났다.
이때의 북한 상황을 잠시 살펴보자.
김일성은 이즈음 치열한 권력투쟁에서 승리,절대적권력을 마음껏 휘두르고 있었다. 김일성은 남한에 대한 민국정부가 수립된지 한달이 못되는 48년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세우고 자신이 초대 내각수상 자리에 올랐다.
김일성은 의회인 최고인민회의 의석중 상당수를 남한용으로 남겨놓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했다.
김일성의 초대내각에는 빨치산 출신인 김책이 부수상겸 산업상,최용건이 민족보위상(국방장관)으로 참여했다.
북한의 공산화 작업은 이미 마무리 상태에 있었다. 김일성은 46년 2월 소련군정의 조언에 따라 토지개혁,주요산업국유화,농업현물세제,남녀평등법 등의 개혁조치를 실시했었다. 47년부터는 매년 경제발전계획을 수립,실행했다.
이러한 개혁조치와 인민의 헌신적 노력,풍부한 부존자원,소련의 지원 등에 힘입어 북한은 40년대말 내가 생각하기로 남한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이룩했다.
새로 수립된 사회주의 국가가 농업의 집단화,중공업화를 통해 초기에 눈부신 경제성장을 한 것은 소련·동구의 예에서도 볼수 있는 공통적 현상이다.
군사력면에서도 북한 인민군은 세계혁명군중 최강의 군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만주·소련등에서 항일운동을 하며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은 지휘관들이 많았고 48년 철수한 소련군에서 인계받은 현대식 군사장비로 무장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49년 2차례 소련을 방문,스탈린과 우호조약을 맺고 탱크·야포 등의 중무기를 지원받아 인민군을 강화했다.
이러한 제반 환경은 김일성의 자신감을 부추겨 한반도 무력통일을 꿈꾸게 했고 남로당출신 등 주변 세력도 이에 가세했다.
또 이때 중국에서는 인민해방군이 본토에서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어 인민군 간부들사이에서도 이를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전쟁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는 가운데 군사적으로도 38선 일대에서 남북간 무력충돌이 빈발,긴장을 한층 고조시켰다.
나는 49년이후 작전국장 책상위에 갈수록 수북히 쌓여가는 38선의 남북충돌 보고서를 보면서 전면적인 전쟁이 한발짝씩 다가오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 가장 기억나는 남북한 군사충돌은 50년초 웅진반도와 개성 송악산전투이다. 어느날 나는 남한국방군이 두곳에서 우리측을 공격,38선을 8백m∼1㎞까지 침범해 들어왔다는 긴급보고를 받았다. 당시 38선 최전선은 내무성 소속의 국경경비대가 맡고 있었고 그뒤를 인민군 정규부대가 받치고 있었다.
나는 현지의 인민군 양춘대대에 반격명령을 내리고 민족보위상이었던 최용건을 수행,현장시찰을 나갔다. 우리가 도착했을때 양춘대대는 국방군을 격퇴하고 보복조치로 남측지역 1㎞안으로 진격해 들어가 있었다. 우리는 이들 부대가 원위치로 복귀토록 지시한뒤 돌아왔다.
또 이 당시 인민군 정찰국에서는 작전국으로 매일 두차례 정보보고를 해왔다. 이정보 보고에는 이승만이 여름장마철이 지나 8월에 북침을 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이같은 정보보고가 아니더라도 이승만 대통령이 당시 공공연히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다닌 사실은 유명한 일이다. 나는 6·25 남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했을때 이승만이 무엇을 믿고 그렇게 허세를 부렸는지 의아해 했다.
아무튼 이런 복합적 상황들이 작용해 김일성은 남한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김일성이 언제 남침을 결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스탈린을 극비리에 방문한 50년초 이전인 점은 분명하다.
나는 김일성의 스탈린 방문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는 있었으나 방문목적은 당시 김일성을 수행했던 비서 문일을 통해 51년경에야 뒤늦게 알게됐다. 나와는 막역한 사이였던 문일은 그때 김일성이 스탈린을 만나 남침계획을 설명하자 스탈린은 『나혼자는 결정할 수 없으니 당정치위원회에 당신의 전쟁계획과 군사협조요청 안건을 회부해 결정하겠다』고 말했다고 털어놓았다. 때문에 김일성은 그냥 돌아왔고 그가 귀국한 얼마후 소련에서 남침 승인통보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소련은 이어 그해 5월 북한에 파견된 군사고문단을 전쟁경험이 풍부한 인물로 전원교체했다. 수석 군사고문은 스미르노프소장에서 독소전쟁영웅인 바실리예프중장으로 바뀌었다.
6·25 남침계획은 바로 이 소련군 고문단이 직접 초안을 작성한 것이며 그 명칭은 「선제타격 작전계획」이었다. 김일성은 이 작전계획서를 넘겨받아 총참모장 강건에게 주었고 강건은 다시 나에게 이계획서를 주면서 『당신이 우리말로 번역 계획을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50년5월초 쯤의 일이었다.
나는 이 계획서를 강건의 감독하에 포병사령관 김봉률 소장,포병사령부 참모장 정학준 소장,공병국장 박길남 대좌등과 논의,우리말로 재작성했다. 여기에 참석한 인물들은 모두 소련출신들이며 군요직에 많이 진출해 있던 연안파 출신들은 작전계획서를 해독할 수 없고 비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제외했다.
우리는 일본식 건물인 민족보위성 청사내 별실에서 보안서약을 한뒤 1개월여에 걸친 작업끝에 작전계획을 수립했으며 내가 이를 최종 종합했다.
완성된 선제타격작전 계획은 ▲전투명령서 ▲육해공군과 각 부대 이동계획 ▲병참보급 계획 ▲남침준비를 군사훈련으로 위장하는 계획등으로 짜여져 있었다.
전투명령서의 핵심내용은 국방군이 북침을 자행하고 있으므로 이를 저지하기 위해 38선 전 전선에서 전면반격을 강행,사흘안에 서울을 점령하라는 것이다.
이 남침계획이 왜 6월25일을 작전일로 택했고 서울 점령만을 목표로 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나는 최종 확정된 작전계획서를 김일성에게 올렸고 김일성은 『동의함』이란 사인을 한뒤 다시 내려보냈다. 이 한마디말로 김일성은 전쟁의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공동집필 최평길교수 연세대>공동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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