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 첩보교육 마친 뒤 극동으로/원산침투 실패… 만주로가 활동/귀대후 병 강등돼 「88여단」 배속/남한 TV극 「김일성 항일」내용에 충격ㆍ감회/지난 봄 북한방문… 김일성 신격화 모습 교차지난달 15일 내한,남한의 이곳 저곳을 돌아 보았던 나는 며칠전 KBS TV의 「여명의 그날」이라는 연속극을 보면서 큰 충격과 감회에 젖은 적이 있었다.
이 연속극이 김일성과 내가 함께 생활했던 하바로프스크 88특별 독립저격여단을 무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속극에 등장하는 친숙한 이름들,그들이 입고 있는 소련군 군복등이 나의 기억을 47년전 그 어느날로 되돌려 감격에 떨게한 것이다. 물론 연속극의 내용이나 인물의 성격묘사는 사실과 다른 것이 많았지만 그것을 문제삼을 기분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더욱 충격받은 사실은 김일성의 항일활동을 재연하는 연속극이 TV에서 방송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다시 자세히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나는 이번 한국 방문에 앞서 지난 5월 북한 초청으로 12일동안 북한을 돌아봤다. 지난 59년 모든 지위를 버린채 북한을 쫓기듯 떠난지 30여년만의 귀국이었다. 그런 그들이 나를 초청한 속셈은 그 무렵 소련에 살고 있던 전 북한고위 인사가 남한을 방문,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개인적 감정을 긴 세월에 묻어버렸던 나는 담담한 심정으로 그들의 초청에 응했다.
그러나 북한 방문중 김일성을 중심으로 모든 역사를 왜곡하고 신처럼 받드는 것을 보고 나는 또다시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같은 경험 때문에 남한에서 김일성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연속극을 보고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88여단 연속극에 내 이름이 등장했는지가 궁금하다. 내가 88여단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내가 재소한인 3세라는 점 때문으로 생각된다.
나의 조부께서는 함경북도 청진부근 부령이란 곳에서 사시다가 1870년께 소련으로 이주하셨다. 이 시기는 생활고에 허덕이던 많은 국경지역 조선인들이 살길을 찾아 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하는 일이 흔했던 때이다.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의 스위푼이란 지역에 정착,황토를 개간,농사를 지으셨던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장남인 나의 아버지 유인준을 낳으셨고 나 역시 레닌혁명이 일어났던 1917년 이곳에서 태어났다.
우리 가족은 2남1녀로 내가 차남이었는데 아버지는 한량기질이 있어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는 나보다 10살 위인 형 성훈을 교육시키기 위해 아버지와 결별한 채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겨갔다.
형님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선사범대학 역사학과에 다녔으며 스위푼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뒤 몸이 약해 학업을 중단했던 나도 중학교 과정을 가르치는 사범대학 부설 노동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나는 병치레를 자주 할 만큼 몸은 약했지만 성격이 온순하고 글짓기를 좋아하는 소년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읽었던 조명희 시인의 글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이 시기에 내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은 해방 후 북한에서 초대 김일성대학 부총장을 지낸 형님의 영향이 컸다.
역사를 전공한 형님은 자주 나에게 우리 역사를 이야기해 주었고 일제하의 조선현실을 설명해줌으로써 민족의식을 갖게했다.
노동학원을 2년 중퇴한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선보신문사에 채자공으로 취직했다. 이 신문은 현재 소련 알마아타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인신문 「레닌기치」의 전신이다.
그러던중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정책이 시작돼 우리 가족은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공화국으로 옮겨가게 됐다.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스탈린은 연해주 일대 한인들이 일본을 도울 것으로 의심,단 이틀만인 48시간내 중앙아시아로 이주토록 내몬 것이다.
이 강제이주 과정에서 소련 한인들은 모진 고난을 겪었지만 우리 가족은 내가 신문사에 일했던 탓으로 특별대우를 받으며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 잠시 정착했다가 39년 형님이 타슈켄트의 조선족 국영농장 중학교장으로 부임해 형님을 따라 타슈켄트로 이사를 했다.
평소 교사직에 흥미가 있었던 나는 타슈켄트에서 다시 1년 과정의 러시아어 교원 강습소에 입학했다. 내가 러시아어를 본격적으로 공부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강습소를 마친 뒤 나는 형님이 있던 중학교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1주일도 못돼 신 사부로부터 징집영장을 받았다. 나는 내 운명을 바꿔놓은 이 징집영장을 받고 내심으로 기뻐했다. 그 까닭은 당시 소련이 조선인을 의심,군인으로 뽑지 않았기 때문에 개인적 능력을 인정받은 듯한 소박한 기쁨이 있었다.
징집에 응하면서 나는 독소전쟁이 벌어지던 서부전선에 배치될 것으로 당연히 생각했으나 이와 달리 모스크바 부근에 있던 소련 최고사령부 직속 정찰학교에 다른 조선청년 16명과 함께 입교했다.
이 학교는 조선인 외에도 독일인ㆍ중국인들에게 첩보원 교육을 시켜 해당지역에 침투시키기 위한 것으로 교육생들이 서로를 알지 못할 만큼 비밀속에 운영됐다.
나는 41년 9월 이 학교에 입교,15개월 동안 독도법ㆍ무전술ㆍ사진촬영술ㆍ조선경제지리 등 전문적인 첩보요원 교육을 받았다.
42년 12월 교육을 마친 우리 조선인 16명은 소위계급을 부여 받은 뒤 블라디보스토크 부근에 있던 소련 극동군 정찰대에 배치돼 본격적인 첩보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시하의 첩보활동은 생명을 내건 위험스러운 일이었다. 실제로 동료 16명중 5명이 1차로 만주지역에 침투했으나 모두 일본군에게 체포되거나 행방불명된 적도 있었다. 이 사건이 있은 뒤 소련군은 우리에게 일본어와 일본풍습 교육을 추가로 시켰다.
43년 6월 드디어 나에게도 조선 원산에 침투,현지에서 생활하며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일본 군복을 입고 무전기와 일본돈을 활동장비로 받은 뒤 부대를 떠나 설레는 마음으로 조선으로 향했다. 국경지대에는 경비가 심해 주로 밤에만 산악지대를 통해 이동했다. 마침내 두만강을 무사히 건넌 나는 강부근에서 처음으로 조선인 2명을 만났다.
그러나 이들은 내 말투를 듣고 소련출신 한인임을 쉽게 알아차렸으며 주변에 일본 군대가 많아 활동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낙심끝에 본부로 무전연락을 해본 결과 만주에서 공작활동을 하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이때부터 한달간 만주를 떠돌며 정보수집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민가에는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산속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임무를 끝낼때 쯤에는 식량도 떨어져 나무껍질이나 산딸기 등으로 허기를 채우는 일도 많았다.
천신만고 끝에 본대로 귀환했을 때 정찰대 책임자인 소련인 이브레프 대령은 화가 잔뜩난 채 나를 맞았다.
이브레프 대령은 이미 모스크바 총참모부 정찰본부에 내가 원산에 침투한 것으로 보고했었기 때문이다.
이브레프 대령은 내가 최초 임무에 실패했다며 정찰장교 직위를 박탈하고 재판에 회부하겠다고 위협했다.
다행히 재판은 받지 않았으나 장교에서 일반병으로 강등된 나는 두달동안 비밀 개인막사에서 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느날 소련군 소령이 나를 찾아와 나의 신상문제를 물어 차라리 서부전선에 보내달라고 요구했으나 그가 『그쪽에는 충분한 병력이 있으니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빨치산 부대로 가라』고 제안,수락했다.
이에 따라 43년 9월 나는 일반병사의 군복을 입고 하바로프스크로 출발했다.
나는 하바로프스크 극동군 사령부에 일단 도착했다가 다시 자동차를 타고 2시간을 달린 끝에 브야츠크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한 부대로 들어갔다.
이 부대가 바로 김일성이 있는 88 특별독립저격여단이었다.
울창한 수림의 한복판에 위치해 있는 이 부대는 1만평이 넘는 넓은 땅에 반토굴식 막사와 통나무집 50여채가 산재해 있었다.
토굴식 막사는 일반병사 숙소이고 통나무집은 간부숙소와 사무실이었다.
나는 이곳에서 여단 정치위원이었던 최용건 대위에게 신고를 한 뒤 1대대장인 김일성을 처음 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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