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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적 K경쟁이 출산 결정에 영향" 절반세대 87%가 지적했다
청년들이 인식하는 한국 사회의 경쟁은 어느 정도나 심각할까.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1991~1994년 출생자 500명과 '절반세대'로 일컬어지는 2001~2004년생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저출생·고령 인구변화에 대한 인식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90% 이상이 한국 사회를 경쟁이 치열한 사회로 인식했다. 경쟁 사회의 단면은 입시와 사교육을 통해 드러난다. 설문에 응한 절반세대 10명 중 9명은 ‘한국의 입시 경쟁이 심하다' '사교육비 부담이 크다'고 답했다. 서울 소재 대학에 재학 중인 경기 안양 출신의 권형민(19)씨는 “고등학생 때 한 달 사교육비로 40만 원 정도 지출했는데, 자사고·특목고 출신들은 100만 원 이상이 기본이라고 말해 놀랐다”고 전했다. 과도한 입시 경쟁은 인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 절반세대의 87%는 '입시 경쟁 및 사교육 부담이 출산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송윤지(23)씨는 "부모님이랑 성적 때문에 많이 싸워서 학창 시절이 행복하지 않았다"며 "내 아이에게는 그런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출산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국토연구원이 2021년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사교육비가 주택 가격보다 합계출산율에 2배가량 더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고 청년들이 경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절반세대 4명 중 3명은 '경쟁은 개인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고 답했다. 다만 절반세대 20명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대학만이 정답이라고 부추기는 입시 문화는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영혼까지 갈아 넣는 입시 경쟁에 부담을 느껴 특성화고에 진학한 최연수(22)씨는 한때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닌지 두려웠다고 한다. 고졸 전형으로 공공기관에 취업한 그는 “대학 가지 않아도 잘 살 수 있다고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조성되면 불필요한 경쟁이 줄어들 것 같다"고 말했다. 남들처럼 고교 성적에 맞춰 대학에 진학한 박하영(26)씨는 "전공이 나랑 안 맞는다는 걸 대학 다니면서 알게 됐다"며 "한 줄로 세우는 교육을 지양하고 다양한 길이 제시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청년들은 경쟁이 공정함의 척도라고 인식하지만, 출발선이 다르다는 문제의식이 매우 강하다"며 "한 곳만 바라보는 획일적인 경쟁 시스템보다는 '나답게' 살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을 요구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전업주부 남편이 꿈이지만 육아휴직 쓰긴 무섭죠"
대학 재학 중 취직한 직장인 박용한(24·가명)씨는 '부인이 돈을 잘 벌면 가사를 전담하는 건 어떻겠느냐'는 질문에 반색하며 말했다. 하지만 맞벌이로 자녀가 생겼을 때 육아휴직을 쓸 생각이 있느냐고 묻자 멈칫했다. "남자도 육아휴직 쓰면 직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실제로 육아휴직 후 적응 못 해 퇴사한 남자 선배도 봤어요. 높은 분들은 여전히 '남자가 뭔 육아냐'고 말하고요." 2000년대생인 '절반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성 평등 의식이 높다. '남성 부양·여성 가사노동'이란 이분법적 성 역할에 대한 거부감도 상당히 크다. 한국일보가 한국리서치와 2001~2004년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절반세대 인식조사'에 따르면,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생계 부양 책임은 주로 남성에게 있다' '부부가 분담해도 가사와 자녀 돌봄 책임은 주로 여성에게 있다'는 의견에 동의한 여성은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 절반세대 남성은 넷 중 한 명꼴로 '맞벌이를 해도 부양 책임은 주로 남성에게 있다'고 답했고, 6명 중 1명은 '분담해도 가사나 육아 책임은 주로 여성에 있다'고 봤다. 남성이 여성보다 '전통적 성 역할'에 동의하는 비율이 높긴 하지만, 절반세대 남녀 대부분은 성별에 따라 역할이 정해져 있다고 보지 않았다. 한국일보가 심층 인터뷰를 진행한 절반세대 20명은 "성별과 무관하게 부부의 성향과 사정에 따라 잘하는 걸 하면 된다" "여성 부양자나 육아하는 아빠처럼 다양한 역할 분담이 생기면 사회 전체적으로도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연봉보다 워라밸을 기준으로 직장을 고르겠다는 대학생 권형민(19·가명)씨는 "아버지가 2교대에 주말 근무로 고생했지만, 어린 시절 함께한 추억이 없어 지금도 서로 불편해한다"며 "결혼하면 아이와 정서적인 교감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절반세대에게 '맞벌이'와 '공동 육아'는 기본값이지만, 현실 속 제도와 환경은 한참 뒤처져 있다. 이들이 괴리를 느끼며 한숨을 내쉬는 이유다. 인터뷰에 응한 20대 초반 청년들은 "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으면 회사에 페널티를 줘야 한다" "남성도 의무적으로 육아휴직을 쓰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놨으며, "육아를 위해 많은 걸 포기하거나 육아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현 상황은 정부가 만든 것"이라고 비판하며 날을 세우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①사회적 돌봄 시설 확대와 ②일·가정 양립 및 성 평등 돌봄 참여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독일은 출산율 하락으로 노동력 부족이 예상되자 연방상공회의소(경제단체)가 가족친화 경영 정책을 추진했다. 돌봄 체계 확대와 아빠의 돌봄 참여 확대는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야 하지만, 일·가정 양립 문화 조성은 기업이 주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자리만 구할 수 있다면…" 지방 살아도 좋다는 절반세대
지난달 20일 전북 장수에서 만난 박하영(26)씨는 장수군의 '하이디'로 불린다. 샌들을 신고도 오르막 산길을 척척 오르고, 트럭에서 모종판을 내리는 모습도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반려견인 보더콜리 '하늘이'를 데리고 뒷산에서 염소를 몰기도 한다. 서울 소재 대학을 다니던 하영씨는 친구들이 취업준비에 몰두하던 2020년 12월, 돌연 고향인 장수로 돌아왔다. 풀 한 포기 보기 어려운 원룸촌에 코로나 방역까지 더해지자, 하영씨는 서울이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는 이들이 살기엔 적합하지 않은 도시라는 판단이 섰다. 고향에 자리를 잡은 하영씨는 4년째 'N잡러'로 살고 있다. 지자체 청년사업 예산을 받아 '시무골예술제' '장수트레일레이스' 등 지역 행사를 기획했고, 농사를 짓고 염소농장 일을 도왔다. 글을 쓰고 강연도 나간다. 하영씨는 "7가지 일을 한 번에 한 적도 있다"고 전하며, 월 수입은 300만 원이 넘을 때도 있고, 100만 원이 채 되지 않을 때도 있다고 했다. 현재는 장수의 첫 서점이 될 북카페를 열 준비로 들떠 있다. 귀향한 뒤 서울이 그리웠던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N잡러로 살다 보니 그간 이해하지 못했던 친구들의 '서울 타령'엔 어느 정도 공감하게 됐다. "왜 서울에 미쳤을까 했는데, 장수에는 번듯한 정규직 일자리가 군청 공무원뿐이에요. 저야 사무직으로 일할 생각 없고 여기에 기반이 있으니 그럭저럭 먹고 살지만, 다른 친구들이 오면 저처럼 살 수 있을까요? 친구들도 어쩔 수 없이 서울에 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일자리가 거기에 있으니까요." 5,000만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사는 대한민국. 젊은이들도 대부분 서울 거주를 희망할까. 한국일보가 창간 69주년을 맞아 한국리서치와 실시한 '저출생·고령화에 따른 인구 변화 인식조사'에서 절반세대 47.2%는 지방에 거주하길 원하거나 거주지가 어디든 상관없다고 답했다. 특히 지방 출신(63.78%)은 수도권 출신(31.2%)보다 지방 거주에 대한 거부감이 적었다. 지방에서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한 젊은이들은 높은 집값과 인구밀도, 경쟁 스트레스를 서울을 기피하는 이유로 꼽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 창원으로 돌아가길 희망하는 송우현(21·가명)씨는 "서울엔 사람이 너무 많다. 혼잡한 지하철을 보면 이태원 참사 같은 게 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경남 마산 출신의 윤은채(21·가명)씨는 "자녀에게 서울의 입시경쟁 스트레스를 주고 싶지 않다"며 "아이를 낳는다면 무조건 지방에서 살 것"이라고 단언했다. 연봉을 더 준다고 해도 수도권에 살고 싶지 않다는 목소리도 있었다. 경남에서 공무원이 되길 희망하는 박태현(23·가명)씨는 "돈 조금 더 번다고 서울에 갈 것 같진 않다"며 "어차피 서울 집값은 근로소득으론 살 수 없는 수준 아니냐"고 말했다. 이처럼 지방에 살고 싶은 청년들이 적지 않은데도, 수도권 과밀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이유는 일자리 때문이다. 원하는 일자리가 수도권에 몰려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양승훈 경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예를 들어 마케팅 일을 하고 싶어도, 지방에는 관련 업체도 없고, 있다고 해도 경쟁력이 떨어진다"며 "서울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사람 많은 것도 싫고, 문화생활에도 큰 관심이 없어 고향인 경남 양산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선주(21·가명)씨도 "일자리만 구할 수 있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윤은채씨도 고향에선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보고 일찌감치 진로를 변호사로 정했다. 청년들의 지방 정착을 유도하려면 인프라 구축이 필수적이다. 수도권으로 직장을 옮긴 최연수(22·가명)씨는 "강원도에서 근무할 때는 뮤지컬 관람도 못 했고, 주변에 필라테스 학원도 없었다"며 "인프라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견디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고향인 대전에서 일자리를 구한 이예진(27·가명)씨는 "지방이 싫다는 수도권 사람들의 심정도 이해는 간다"며 "나도 충남의 다른 중소도시에서 살라고 하면 자신이 없다"고 토로했다. 정부도 지방 일자리 부족이 수도권 과밀의 근본 원인이란 점은 알고 있다. 2019년까지 16년 동안 혁신도시 조성을 통해 총 153개 공공기관을 비수도권으로 이전했다. 하지만 수도권 인구는 감소하지 않았다. 지방으로 근무지를 옮긴 직원들은 그곳에 정착하기보단 서울로 출퇴근하거나 주말부부가 되는 길을 택했다. 전문가들은 인구 이동을 위한 근본적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이상림 보건사회연구원 연구위원은 "공공기관을 전국에 너무 골고루 분산시킨 게 혁신도시의 문제"라며 "지방에도 판교 같은 정보기술(IT)산업 중심지를 조성해 청년들이 서울이 아닌 곳도 대안으로 택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고 제시했다. 청년들을 반드시 지방에 정착시킬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낮시간에만 지방에 머무는 '생활인구'도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생활인구란 주민등록인구뿐 아니라 지역 체류자(통근·통학 등)까지 실질적 인구로 포함하는 개념이다. 행정안전부는 내년부터 89개 인구감소 지역을 대상으로 시범적으로 생활인구를 산정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