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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싸움의 고수는 낭만을 아는 법이다

입력
2024.08.13 04:30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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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2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만나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어쩌면 뻔한 질문. "국회의원들은 카메라 앞에선 다신 안 볼 원수처럼 악착같이 싸우다가도 카메라 밖에선 '형님, 동생' 하면서 친하게 지낸다는데 맞나요?" 국회를 출입할 때마다 주변인들로부터 적지 않게 들었던 질문이다. 대체로는 '그렇다'고 답했던 것 같다. 정치의 기본은 갈등과 대립 속 공통분모를 만들어가는 일이고, 보수와 진보가 각자의 가치와 정책 노선을 두고 싸우더라도 결국엔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상식과 방향을 찾아갔기에. 이를 위해선 처절한 싸움도 그리고 통 큰 양보도 불가피하니까 말이다. 그 시끄럽고 요란스러운 하모니를 한 야당 정치인은 "낭만"이라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11년 전, 여야가 연말 빅매치인 예산안을 두고 세게 맞붙었다. 카운터파트너였던 여당 의원이 다 된 밥에 돌연 어깃장을 놓으면서 회의는 파행으로 치달았고, 의원은 잠적했다. 최대한 더 많은 걸 따내기 위한 '벼랑 끝 전술'이었을 것이다. 야당 의원이 택한 건 담판이었다. "형이 정리할 테니 회의장 나오지 마. 한 번 믿어봐라." 서로를 향한 신뢰 덕분이었을까. 여야는 절충안을 도출해 통과시켰다. 두문불출하는 것으로 협조를 택한 여당 의원은 합의 후 지역구 유명 제과점의 빵을 한 아름 안기는 애교를 선보였다고 한다. "그래도 그땐 그런 낭만이 있었어."

그런 낭만, 2024년 정치권에선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카메라 앞에서도 싸우고, 카메라 밖에서도 또 싸운다. 상대는 오로지 '나의 투쟁'을 위한 도구일 뿐. 싸움은 더 이상 기술이 아닌 그 자체로 정치의 목적이자, 사명이 됐다. 야당은 다수 의석으로 밀어붙이기 바쁘고, 대통령은 거부권을 무기로 법안을 튕겨 내기 급급하다. 양쪽 공히 싸워야 표가 되고, 싸워야 그나마 인기를 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멈추지 못하는 듯하다. "윤석열, 한동훈과 맞짱 떴을 때 기세에 밀리지 않고 잘 싸울 사람을 뽑는 거지. 지금 우리가 점잔 떨 판은 아니잖아요." 민주당 최고위원에 출사표를 던진 한 정치인의 한마디는 싸움이야말로 여의도 금배지 생존의 치트키가 돼버린 뉴노멀을 상징한다.

문제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싸움이냐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두 달이 넘도록 치고받은 끝에 과연 무엇이 남았나. 젊은 해병대원의 죽음 뒤에 가려진 어처구니없는 진실을 밝혀낼 첫걸음은 아직도 떼지 못했다. 물가는 치솟고 증시는 폭락하고 먹고살기 힘든 와중에 독한 더위에 사람까지 죽어가는 데도, 정치권은 민생법안 단 한 건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저 싸움을 위한 싸움에만 골몰한 탓이다. 되는 일은 하나 없는데도, 안 되는 일만 쭉 늘어놓으며 트로피 삼아 자랑만 하고 있다.

이 싸움에 과연 승자는 있는가. 지금 당장은 맹목적 싸움에 열광하는 강성 지지자들의 환호와 응원에 취해 도파민이 치솟을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럴 노릇인가. "물 밖에서 찰랑이는 일렁임에 치고받을 게 아니라, 느리지만 도도하게 나아가는 강물 아래 민심의 흐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낭만의 실종을 개탄하던 정치인이 덧붙인 말이다. 정치에서 싸움은 숙명이다. 다만 왜, 누구를,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는가. 국민 모두가 더 평안하게, 잘살 수 있게 하는 '제대로 된 싸움'이어야 하지 않는가. 국민 모두가 다 아는 뻔한 질문과 답을 뉴노멀의 여의도를 사는 정치인들만 모르는 듯하다.

강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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