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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본 법사가 육환장을 날린 까닭

입력
2024.08.12 04:30
23면
0 0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서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육환장을 들고 있는 사명대사 동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육환장을 들고 있는 사명대사 동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아버지 진평왕으로부터 훌륭한 덕성과 정치적 환경을 물려받은 선덕왕은 신라 최초 여왕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해냈다. 내치와 외치 양면에서 흠잡을 곳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첨성대를 세운 이도 선덕여왕이었다. 그런 여왕이 병에 걸려 고생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각각 한 번씩 나온다.

먼저 삼국사기 기록이다. 선덕여왕 5년 3월 왕이 병에 걸렸는데 의술과 기도가 모두 효험이 없자, 황룡사에 백고좌(百高座)를 베풀고 승려를 모아 인왕경(仁王經)을 강설하게 했으며, 100명의 승려에게 도첩(度牒)을 주었다. 백고좌란 고승 100명을 매일 한 명씩 초청해 진행하는 법회다. 한꺼번에 100명을 초청하는 경우도 있으나 인왕경을 읽는다는 점은 같다. 한마디로 비상시 총동원 집회인 셈이다.

다음은 삼국유사다. 왕이 병에 걸린 지 오래됐다. 흥륜사에 법척(法惕)이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불려 와서 병을 고치려 했으나 시간이 지나도 효험이 없었다. 그때 덕행이 높다는 밀본(密本) 법사의 소문이 자자했다. 왕은 신하를 시켜 불러들였다. 밀본은 궁 안 한갓진 곳에서 약사경(藥師經)을 읽었다. 책을 한 권 다 읽어갈 무렵, 가지고 있던 육환장(六環杖ㆍ승려가 짚는, 고리가 여섯 개 달린 지팡이)이 날아 침실 안으로 들어가더니, 늙은 여우 한 마리와 법척을 찔러 마당 아래로 거꾸러뜨렸다. 왕의 병도 곧 나았다.

두 기록이 같은 일을 두고 적은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전체적인 흐름에서 비슷해도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른 데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사기와 유사의 기록을 합쳐 본다면, 의술과 기도를 거쳐 법척까지 지난 다음 밀본에 와서야 왕은 완쾌한 셈이다. 밀본은 출신이 한미한 밀교 승려이다. 반면 '흥륜사의 법척'은 정통 불교 쪽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법척이 치병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병의 원인으로 보이는 '늙은 여우'와 함께 육환장에 찔려 죽었으니,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주저하게 된다. 법척이 백고좌의 일원으로 왔다가 죽은 변고 속에 어떤 경고가 숨어 있을까.

흥륜사는 신라 왕실이 처음으로 인정한 공식 사찰이다. 그러므로 왕실의 후원을 받는 흥륜사에 소속된 법척은 정통 불교, 혹은 권력 불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권력 주변의 그들이 무능(법척)과 타락(늙은 여우)으로 흘러 치유의 가능성이 전혀 없자, 깨어있는 재야의 승려(밀본)가 ‘썩은 심장’을 향해 육환장을 날렸다고 해석하면 어떨까. 역사는 그렇게 해서 맑은 줄기를 만들어 왔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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