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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치는 87년 헌법 체제

입력
2024.07.17 04:3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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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자료사진

연합뉴스 자료사진

헌법 제정 76주년이다. 헌법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뒷받침한다. 제헌절 노랫말과 같이 헌법은 "대한민국 억만 년의 터"다. 하지만 그간 헌법은 "발췌개헌, 4사5입개헌, 4·19, 5·16, 3선개헌, 유신, 5·18"로 이어지는 정변의 제물이 되었다. 이제 제헌절은 공휴일에서 제외될 만큼 '잊힌 날'이다. 1952년 제1차 개헌이 이승만의 재집권을 위한 직선제 개헌이라면, 1987년 개헌은 직선 쟁취라는 국민적 열망의 반영이었다. 헌정사는 제도 그 자체보다 그 제도의 동시대 정합성과 정상적 작동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보여준다.

1948년 제헌 이후 39년간 9개의 헌법, 6개 공화국이 명멸해감으로써 공화국이라는 '상품전시장'(foire)이 되었다. 87년 헌법은 37년간 존속함으로써 헌법의 안정과 더불어 네 번의 평화적 정권교체로 외형적 민주주의가 성숙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내실을 다지는 일은 아직도 요원하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면서 동독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흡수 통일되었다. 구소련의 몰락과 더불어 인민민주주의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였다. 적어도 현시점에서 역사는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담보한다. 그런데 러시아와 중국에서 권위주의 체제의 재등장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위협으로 작동한다. 다른 한편 자유민주주의의 모국인 미국·영국·프랑스에서 정치적 소용돌이(vortex) 속에 지도자의 위기는 연대와 관용(tolerance)을 동반하지 않는 자유란 허구일 뿐임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통령 '권력의 인격화'(personnalisation du pouvoir) 행태가 사라진 자리에 대통령 권력과 의회 권력의 충돌만 난무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체인 자유민주주의는 사회의 다양성과 다원성이 존중되는 다원적 민주주의(pluralist democracy)로 구현되어야 한다.

필자는 87년 헌법 체제에서 대통령과 의회다수파의 관계를 여섯 가지로 설정한 바 있다(헌법학 제24판, 396면). 그중 대통령 재임 중 단일 야당이 총선에서 승리한 경우는 가설로 남겨 두었다. 그런데 2024년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한 더불어민주당은 의회 권력으로 대통령 권력을 제압하려 한다. 탄핵과 특검으로 정부를 무력화하려 한다. 대통령은 거부권으로 맞대응하지만 힘이 부치는 형국이다. 서로 상대방을 악마화한다. 코로나 이후 산적한 민생대책은 뒷전이다. 이제 프랑스식 동거정부(gouvernement de la cohabitation)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미국식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에 적응하는 헌정운용을 할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국민이 정치를 걱정해서는 아니 된다.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0대 경제대국을 일군 위대한 대한국민은 언제나 살아있는 심판자이다. 1류 국민은 4류 정치를 혐오한다.

정치 제도야말로 '나눔의 미학'이 작동하여야 할 현장이다. 대통령은 외교, 국방, 통일과 같은 국가의 안전과 존립에 직결된 국익의 구현자여야 한다. 국내 정치와 민생은 내각과 의회가 중심축이 되어야 한다.

헌법의 안정을 구가하는 시점에 권력의 민주화, 지방화로부터 이어지는 세계화, AI 시대의 기본권도 포섭하는 등 시대정신을 반영한 헌법을 그려나가야 한다. 이제 헌법이 국가가 당면한 현실을 능동적으로 반영할 수 있도록 헌법 개정절차의 연성화, 즉 현재보다 간편한 개헌절차가 필요하다. 지금과 같은 필수적 국민투표는 폐지하고 국회에서 개헌이 가능하도록 하여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의회에서 개헌을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독일은 1990년 통일 후 31차례에 걸친 개헌으로 국민통합을 이루었다. 프랑스는 대통령임기·동거정부 등 정치적 현안이 제기될 때마다 의회에서 개헌으로 이를 현실화하였다. 개헌을 통하여 적시에 국민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헌법이 살아있는 규범으로 작동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도 우선 현행 대통령 5년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어 국회의원의 임기와 일치시키는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성낙인 전 서울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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