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미술 특화 빌딩' 특색 살리면서
② 접근성 좋은 곳으로 갤러리들 이전
③ 글로벌 경매업체도 신사옥 확장 바람
"갤러리가 몇 층에 있죠?"
"어떤 갤러리요? 이 건물엔 갤러리만 4개가 있는 걸요."
27일 홍콩 센트럴 지역의 '에이치 퀸스(H Queen's)' 빌딩에서 엘리베이터 보안 요원과 나눈 대화다. '미술 특화 건물'을 내세워 2018년 건축된 이 건물엔 갤러리 4곳(데이비드 즈워너, 페이스 갤러리, 탕 컨템포러리 아트, 화이트스톤 갤러리)이 각기 다른 층에 있고, 예술재단과 경매업체도 있다.
홍콩의 유명 건축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윌리엄 림이 미술 전시를 염두에 두고 설계한 이 건물은 홍콩을 방문한 미술 애호가들의 필수 방문 코스다. 8층 화이트스톤 갤러리에서 만난 갤러리스트 나오미 로는 "여러 전시를 한 번에 볼 수 있는 것이 사랑받는 이유"라고 말했다.
'건물'로 엿보는 홍콩 미술 시장 지각변동
'미술 특화 빌딩'은 아시아 미술 중심지 홍콩의 오랜 상징이었다. 세계 최정상 갤러리인 미국의 가고시안 갤러리는 에이치 퀸스와 걸어서 10분 거리인 페더 빌딩에 있다. 미술 행사가 집중되는 기간엔 이 건물들만 '도장 깨기' 하듯 방문해도 아시아 미술 시장의 최첨단을 파악할 수 있었다.
최근엔 분위기가 달라졌다. 한데 뭉쳐 있던 갤러리들이 뿔뿔이 흩어져 접근성이 좋은 곳에 새로 둥지를 틀기 시작한 것. 홍콩 컨벤션센터를 중심으로 경매를 열었던 크리스티 홍콩 등 미술품 경매 업체들도 독자적인 공간을 개관하며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거기엔 사정이 있다.
① 빌딩 속 숨어있던 유명 갤러리... 밖으로, 밖으로
1923년 건축된 페더 빌딩은 홍콩 미술 시장을 상징하는 건물이자 홍콩의 랜드마크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엔 가고시안을 비롯해 마시모 드 카를로, 리만 머핀 등 유명 갤러리 약 7곳이 3층부터 7층까지를 꽉 채우고 있었지만, 이제는 가고시안밖에 남지 않았다.
2022년 페더 빌딩에 있던 이탈리아 기반 갤러리 마시모 드 카를로는 영국 식민지 시절 교도소 건물을 리노베이션해 개장한 타이쿤으로 옮겨갔다. 타이쿤은 19세기 후반 빅토리아 양식의 역사적 건물을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헤어초크 앤드 드뫼롱이 재탄생시킨 현대적인 예술 문화 공간이다. 탁 트인 광장을 내려다보는 타이쿤 건물 2층 갤러리에서 29일 만난 리카도 체스티 마시모 드 카를로 홍콩 디렉터는 "팬데믹을 거치면서 홍콩의 미술 시장 상황이 무척 좋지 않았다"며 "건물 안에서 고객을 기다리기보다 사람들 속에 뛰어들어 더 자주 만나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고 설명했다.
세계 3대 갤러리로 꼽히는 하우저 앤드 워스도 아시아에 유일하게 두고 있는 홍콩 지점을 확장 이전했다. 에이치 퀸스의 15, 16층에 있었던 이 갤러리는 접근성이 떨어졌고 방문객이 몰리는 아트페어 기간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기 어려울 정도로 붐볐다. 이에 인근 건물로 자리를 옮겨 1층부터 3개 층에 걸쳐 약 929㎡(281평)의 공간을 쓰고 있다.
② 독자 공간으로 확장하는 미술품 경매업체
올 9월 글로벌 경매 업체 크리스티는 아시아 태평양 본사를 자하 하디드 건축사무소가 설계한 신축 오피스 빌딩 '더 헨더슨'으로 옮긴다. 이 건물의 주소지인 2 머레이 로드는 부지 매입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비싼 땅으로 주목받았다. 크리스티는 건물 4개 층에 걸쳐 4,644.6㎡(약 1,405평)의 공간을 미술품 구매 고객을 위한 '원스톱 허브'로 조성 중이다. 크리스티는 이달 마무리되는 2024년 상반기 경매를 끝으로 19년 동안의 홍콩 컨벤션센터 임대 생활을 청산한다.
공간 설계를 맡은 베티 응 건축사무소 콜렉티브의 디렉터는 "미술품 경매장과 미술관 수준의 갤러리 공간, 고객과 교류하는 공간, 미술 교육 공간을 사무용 빌딩에 넣는 것 자체가 굉장히 도전적인 과제였다"면서도 "크리스티의 새 사옥은 경쟁 경매 업체뿐 아니라 미술계에서 전무후무한 공간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또 다른 경매 업체인 소더비도 올해 홍콩에 자체 경매장과 전시장 개관을 앞두고 있고, 필립스옥션은 지난해 엠플러스 등 미술관과 박물관이 밀집한 서구룡 문화지구에 신사옥을 열었다.
미술 시장, 돌고 돌아 다시 '홍콩'인 이유
홍콩의 아시아 미술 허브 지위는 2020년대 들어 정치 불안정으로 위협받았다. 최근 갤러리와 경매 업체 등은 홍콩에 전격적으로 투자하며 몸집을 키우고 있다. 홍콩이 아시아 지역의 미술 거점으로 건재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세금 혜택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홍콩은 미술품 세금이 전혀 없다. 과거 아시아의 미술 맹주로 최근 홍콩과 치열하게 경쟁하는 싱가포르는 부가가치세 7%가 붙는다. 수천만 원에서 수백억 원까지 호가하는 미술품은 낮은 세율도 무시할 수 없는 숫자다. 한국은 수입 미술품에 관세와 취득세는 면제되지만 양도세(생존 작가 작품은 면세)가 붙는다.
프랜시스 벨린 크리스티 아시아 태평양 총괄 사장은 "홍콩은 자본, 사람, 물자의 흐름이 자유로운 특별한 도시"라며 "아시아 지역 컬렉터의 75~80%가 중국, 대만, 홍콩 등 중화권인 점도 홍콩이 건재할 것이라 보는 중요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는 "홍콩엔 운송사, 물류 창고 등 기반 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미술 전문 인력이 많은 만큼 홍콩을 거점으로 아시아 전략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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