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녹동항에서 지죽도까지
지난 16일 오후, 6명의 외국인 여성들이 고흥 녹동항에서 일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포르투갈, 브라질, 대만,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20대 초·중반 여성들은 친구의 추천으로 이른바 ‘촌캉스’ 여행을 왔다고 했다. 서울에서 통역사, 모델, 웹디자이너 등으로 활동하는 이들에게 4박 5일의 고흥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정원처럼 예쁘게 꾸민 쑥섬이 가장 맘에 들었다는 의견이 많았다. 팔영산 편백자연휴양림에서 보낸 힐링의 시간, 유자강정과 도자기 만들기 체험이 인상 깊었다는 이도 있었다. 높은 산과 넓은 들, 푸른 바다를 품은 고흥엔 볼 것도 많고 먹을 것도 풍성한데, 이번에 소개할 곳은 ‘진짜’ 고흥의 숨겨진 명소다.
소록도 바깥에도 한센인의 설움이
녹동항에서부터 동쪽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유로운 풍경에 잔잔한 감동을 품은 명소가 흩어져 있다. 녹동항은 해산물 먹거리가 풍성한 곳이다. 항구 앞 녹동바다정원은 일몰 명소이자 여행객의 쉼터다.
소록대교 건너 사슴을 닮았다는 소록도는 한센인의 애환이 깃든 섬이다. 일제강점기인 1916년 자혜의원이 들어서고 전국의 나환자를 강제 수용한 인권의 사각지대였다. 연인원 6만여 명을 강제 동원해 조성한 중앙공원이 상징적이다.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공원과 해안 산책로가 이제 관광객의 볼거리지만, 검시실과 감금실 등은 이 섬과 한센인이 겪은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근래에는 오스트리아 출신 간호사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40년 가까이 한센인을 위해 헌신한 섬으로 주목받고 있다.
당시 한센인의 설움과 아픔은 섬 바깥에도 남아 있다. 녹동항에서 도화면으로 이어지는 77번 국도를 따라가면 일직선의 제방길을 수차례 통과한다. 첫 번째 직선 도로가 끝나는 언덕배기에 ‘오마간척한센인추모공원’이 있다. 길가에 주차장을 번듯하게 조성해 놓았지만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언덕으로 오르면 다섯 마리 말과 간척사업에 동원된 한센인을 기리는 조형물, 돔 형식의 작은 전시실이 있다. 오마도(五馬島)는 해안을 낀 다섯 개의 섬(고발도, 분매도, 오마도, 오동도, 벼루섬)이 말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간척사업은 1962년 고흥 출신 국회의원이 소록도병원장에게 '환자들의 자활 정착사업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추진됐다. 한센인들은 '내가 살 땅을 내가 만든다'는 벅찬 꿈에 부풀었다. 계획대로라면 연간 2,500톤의 양곡을 생산할 수 있는 농지가 생기는 사업이었다. 그러나 자연재해와 익사 사고, 노임 미지급, 인근 주민들의 반발 등으로 공사는 어려움에 봉착했고, 결국 사업 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가며 '나환자들은 정착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2년 넘는 기간 한센인의 피와 땀은 보람 없이 사라지고, 천형의 섬 소록도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꿈도 함께 좌절되고 말았다.
“섬 안에 시설이 한 가지씩 늘어갈 때마다 그만큼 섬 전체가 … 점점 더 지옥으로만 변해가고 있었듯이, 이번에도 이 섬은 공원이 하나 더 늘고 … 그 노력이나 희생의 크기만큼 섬은 점점 더 낙원과는 인연이 멀어져 가고 있었다." 소록도 한센인의 상황을 묘사한 이청준의 소설 ‘당신들의 천국’ 한 대목이 전시실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공원 양쪽으로는 간척으로 생긴 들판이 너른 바다를 배경으로 시원하게 펼쳐진다.
명승이지만 "출입금지", 지죽도 금강죽봉
해안도로를 계속 따라가면 도화면 남쪽 끝에 지죽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2003년 다리로 연결돼 차로 갈 수 있는 섬이다. 해발 203m ‘큰산’ 뒤편에 절경이 숨어 있다. 2021년 문화재청이 명승으로 지정한 금강죽봉이다. 대나무처럼 솟구친 바위 봉우리가 금강산에 비견할 만하다는 작명이다. 계획대로라면 ‘풍광이 끝내주는 곳이니 꼭 한번 가보시라’고 권유할 참이었는데, 현장에 도착하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마을을 지나 큰산 어귀에 당도하니 ‘지정된 탐방로가 아니므로 출입을 절대 금지한다’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 낙석 사고와 추락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결국 다도해국립공원의 협조를 받아 직원이 동행하는 조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미리 말하면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점찍어 두었다가, 훗날 정식으로 탐방로가 개설된 후에 안전하게 다녀올 것을 당부한다.
탐방로가 없는 건 아니다. 2017년 고흥군에서 길을 개설했지만 안전시설이 미비해 폐쇄했다. 큰산 뒤편 해안 쪽으로 돌아 완만하게 정상까지 올랐다가 마을로 곧장 내려오도록 설계돼 있다. 마을 공동묘지를 지나자마자 짙은 난대림 터널로 진입한다. 햇볕이 거의 들지 않는 오솔길이다. 운치가 그만인데 주위에 각진 바위 조각이 무수히 떨어져 있다.
금강죽봉은 최고 높이 100m에 달하는 주상절리가 다섯 개 봉우리를 이루며 곧추서 있다. 가파른 구간을 통과해 첫 번째 봉우리에 닿으면 제법 넓은 암반이 형성돼 있다. 바위 끝은 바로 낭떠러지다. 오금이 저려 절로 뒷걸음질친다. 바로 앞에 홀로 떨어져 뾰족하게 솟은 송곳바위가 있다. 온라인에는 그곳에 올라서서 찍은 인증사진이 다수 검색되는데 위험천만한 행위다. 실제 한 여성이 추락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다고 한다.
금강죽봉 절경을 한눈에 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 번째 봉우리와 네 번째 봉우리에서 그나마 웅장한 실체를 일부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안전이다. 섣불리 개방했다가 좁은 암반에 사람이 몰리면 아찔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
먼바다 풍경은 넉넉하고 평화롭다. 멀리 여수 손죽도와 초도, 고흥 시산도 등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수평선에 아른거린다. 마을로 내려올 때는 바로 옆 무인도인 대염도가 하트 모양으로 보인다. 큰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 잡은 마을과 이웃한 죽도 풍경이 정겹게 내려다보이고, 지죽대교 아래 바다는 회색빛 갯벌에 푸른 물감을 풀어놓은 듯 에메랄드 물빛이 은은하다.
섬에는 금강죽봉 말고도 사시사철 샘물이 흐르는 해식동굴, 간조 때 드러나는 누운 주상절리도 자랑이지만 역시 탐방로가 정비돼 있지 않다. “먼 길 온 사람에게 미안스럽기도 하지만 알고는 들어가게 둘 수 없는 상황입니다.” 이언태(74) 이장은 외지인의 출입을 막아야 하는 상황이 난감하다고 했다. 섬 주민들 간에도 명승으로 지정됐으니 개방해야 한다 의견과,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고 쓰레기만 버리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국립공원에서 정식으로 탐방로를 개설하고, 여행객을 위한 최소한의 편의시설이 갖춰질 때까지 금강죽봉은 당분간 고흥의 ‘숨겨진 명승’으로 남을 듯하다.
이순신 첫 부임지와 금탑사 비자나무숲
금강죽봉에 가지 못하는 아쉬움은 천등산(553m)에서 달랠 수 있다. 만만치 않은 높이지만 해발 400m 철쭉공원까지 차로 올라갈 수 있다. 사동마을과 호덕마을을 잇는 고갯마루에 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두 마을에서 각각 5㎞ 거리, 시멘트 포장도로와 일부 비포장이 섞인 산길이다.
주차장에서 정상까지는 약 900m로 1시간 정도면 다녀올 수 있다. 능선 좌우 철쭉은 모두 지고 없지만 전망대에서는 거금도를 비롯한 다도해 풍광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뒤편으로는 드넓은 간척지 너머로 고흥의 명산 팔영산이 우뚝 솟아 있다.
산자락 금탑사의 비자나무숲은 고흥의 또 다른 숨겨진 명소다. 사찰 위아래에 높이 10m에 이르는 아름드리 비자나무 3,30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수령이 대략 300년 정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학술적, 생태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는데도 절간 입구에 안내판 하나 세운 것이 전부다. 숲에도 탐방로나 산책코스를 개설하지 않았다. 숲의 운치를 제대로 맛보려면 사찰 뒤편으로 가야 한다. 검푸른 비자나무 군락이 동백나무, 대나무와 어우러져 한낮에도 어두컴컴해 신성한 기운이 감돈다. 하나둘 찾아온 탐방객의 발걸음에 오솔길이 희미하게 나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발포항이 있다. 충무공 이순신이 수군 만호로 첫 부임한 곳이다. 마을 뒤편에 옛 수군진성과 사당(충무사)을 복원해 놓았다. 사당은 문이 굳게 잠겨 있고 바로 앞에 ‘청렴광장’이라는 작은 공원을 조성해 놓았다.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재직할 때(1580년 7월~1582년 1월) 전라좌수사가 부하를 보내 거문고를 만들기 위해 진성에 있던 오동나무를 베 가려 했다. 이순신은 ‘관청의 재산이니 누구도 함부로 벨 수 없다’고 물리쳤다. 직속상관이라도 부당한 명령은 따를 수 없다는 강직함과 청렴성을 보여주는 일화다. 공원에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오동나무를 여러 그루 심었다. 엷은 보랏빛이 감도는 오동나무 꽃잎이 종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바람에 날리고 있다.
발포항에서 산자락 하나를 넘으면 발포해수욕장이다. 약 500m에 이르는 제법 큰 해변이 돌출된 갯바위로 분리돼 있어 아담하고 아늑하다. 여유롭게 맨발 산책을 즐기기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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