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전 14기에서 규제기준 못 미쳐
추가 설치하고, 차차 교체하기로
"긴급 조치 필요하진 않다"지만
"한수원 실정, 원안위 방치 문제"
국내 원자력발전소 14기에 성능이 기준에 못 미치는 '피동촉매형 수소재결합기(PAR)'가 설치돼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PAR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와 같은 수소폭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대비하는 안전장치인데, 정작 사고가 나도 제 역할을 못한다는 의미다.
원자력안전당국은 긴급한 안전조치가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지만,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과 규제기관인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애초에 장치 성능을 제대로 검증하고 관리했어야 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수소 충분히 제거 못하는 수소제거장치
원안위는 9일 제194회 원안위 회의를 열고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으로부터 PAR 수소제거율 실험 결과를 보고받았다. PAR는 원자로 건물 내에서 중대사고 등으로 수소가 발생할 때 수소와 산소를 결합해 물로 만들며 수소 농도를 낮추는 기기다. 국내 원전에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듬해인 2012년 안전 강화 조치로 설치됐다.
실험은 원자로 내 수소 농도가 8%인 환경에서 PAR 성능을 검증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 결과 PAR의 수소제거율은 초당 0.309~0.328g이었다. 이는 PAR 구매 당시 요구했던 규격(초당 0.5g)에 한참 못 미치는 수치다. 이를 바탕으로 같은 제조사(세라컴)의 PAR가 설치된 원전 18기(고리 3·4호기, 한울 1~6호기, 한빛 1~6호기)에 중대사고가 발생했다고 가정하고 분석해보니, 그중 14기에서 격납건물 내 평균 수소 농도가 10.10~13.61%로 허용 기준(10% 미만)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해당 원전에서 중대사고로 수소 농도가 치솟아도 충분히 제거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번 조사는 2021년 국민권익위원회에 세라컴의 PAR 성능이 기준에 못 미친다는 공익제보가 들어오면서 시작됐다. 국내 원전들에는 세라컴과 한국원자력기술(KNT)이 제조한 PAR가 설치돼 있다. 이날 실험에 앞서 이뤄졌던 선행 조사에서도 세라컴 제품은 한수원이 최초 구매할 때 요구했던 성능에 미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다만 KINS는 긴급한 안전 조치가 요구되는 상황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격납건물 내 평균 수소 농도가 10%를 초과하는 사고 발생 빈도가 1조~10조 년에 한 번 일어나는 수준이고 △사고 진행 단계마다 대응 설비와 전략이 있으며 △수소가 일부 자연 연소된다는 이유에서다.
원안위 "규제 기준 맞게 복구하라"
원안위는 한수원에 원전 14기의 수소 제어 성능을 규제 기준에 맞게 복구하라는 행정조치를 내렸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한수원 측은 PAR를 추가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한번 설치된 PAR는 떼내기 어렵기 때문에 사고 상황에서 수소 농도를 충분히 낮출 수 있도록 PAR를 여러 개 더 설치한다는 얘기다. 이후 중·장기적으로는 PAR를 교체하겠다고 한수원은 약속했다. 정용훈 한국과학기술원(KAIST) 원자력 및 양자공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안전성 측면에서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본다. (수소 제거) 용량을 늘리거나,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전 확보에 중요한 장치인데도 명백하게 성능이 떨어지는 제품을 설치해둔 채 오랫동안 방치했던 한수원과 원안위 모두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박종운 동국대 원자력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사고 났을 때 작동 못하는 PAR는 설치할 이유가 없다. 한수원의 실정, 원안위의 방치가 만든 문제"라고 꼬집었다. 김용수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도 "사고 발생 빈도는 낮지만, 일어나면 영향이 크기 때문에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국내산을 고집 말고, 해외에서라도 기준에 맞는 제품을 도입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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