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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너는 성심을 다하고 있느냐

입력
2024.05.07 19:00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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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박주영부장판사

편집자주

<어떤 양형 이유> <법정의 얼굴들>의 저자인 박주영 판사가 세상이란 법정의 경위가 되어 숨죽인 채 엎드린 진실과 정의를 향해 외친다. 일동 기립(All rise)!

조희대 대법원장. 뉴스1

조희대 대법원장. 뉴스1

'청송지본 재어성의(聽訟之本 在於誠意·송사를 처리하는 근본은 성의에 있다).'

법원의 높은 분들 인사말로 자주 인용되는 목민심서의 한 구절이다. 좋은 말이지만 너무 많이 듣다 보니 별 감흥이 없다. 여러 이유에서 판사의 성의는 현실에서 보기 어렵다. 송사에서의 성의는 대부분 당사자에 속한 말이다. 그 사례다.

"25년 전쯤으로 기억합니다. 일과를 마치고 퇴근을 하다가 우연히 저는 그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한 늙수그레한 할머니 한 분이 법원 정문 앞에 있는 서늘한 돌기둥 하나를 붙들고 한참을 흐느끼고 있더니, 조금 떨어져 서서 그 말 못 하는 돌기둥을 향하여, 쉴 새 없이 허리를 굽혀 연신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사재판으로 구금된 자식을 둔 어머니로 보였습니다. 그 늙은 어머니의 절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그 사진 속의 희미한 영상은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지금 너는 네가 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고 있느냐'고. 아들이 구금된 그 속수무책의 상황에서 그날 저녁 그 어머니는, 자기 방식대로 성심을 다하고 있었습니다."(재판의 법리와 현실, 고종주) 이 글을 읽은 후로 나도 한 번씩 스스로 되묻곤 한다. '지금 너는 성심을 다하고 있느냐'고.

지난달 말 조희대 대법원장이 부산법원(고등, 지방, 가정, 회생)을 방문했다. 관내 법원이 돌아가며 다양한 건의를 했고 나도 동부지원을 대표하여 해외 연수를 떠나는 판사 2명의 후임을 신속히 충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다른 법원의 건의도 대부분 인력과 돈 얘기였다. 물론 즉각적인 조처가 어렵다는 사정은 다들 알고 있었다(들어줄 수 있는 건의였다면 왜 그때까지 들어주지 않았겠는가!). 공허한 요청과 맥 빠진 답변이 오갔고, 미안해하는 대법원 관계자들과는 달리, 질의자 중에서 서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구내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모든 일정이 끝났다. 식사를 마칠 즈음 대법원장이 어린 자녀를 둔 법관과 직원에게 예쁘게 포장된 케이크를 선물했다. 그들이 대법원장께 감사 인사를 하자 대법원장은 "제게 감사하지 마세요, 국민이 주는 케이크입니다"라고 말했다. 법원에 재직하며 많은 행사에 참석했지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법원장은 회의석상에서도, 비록 여건이 어렵더라도 국민이 불편을 겪고 있다면 신속한 재판을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하자는 말을 했고 "사법부의 독립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도 결국 국민을 위해서 의미 있는 것 아니겠어요"라는 말도 했다. 당연한 말인데도 역시 낯설었다.

인력과 예산이 정량의 문제라면, 성심은 정성의 다른 말이다. 정량으로 정성을 담보할 순 없지만 정성이라면 정량의 부족을 메꿀 수 있다. 물론 정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한 오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성이 바닥인 한 아무리 물자를 퍼부어도 소용없다. 송사의 근본은 성의에 있기 때문이다.

판사를 바로 세우고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은 시간이나 돈이 아니라 화두다. 재판이라는 막중한 업무를 수행하는 공복으로서 돌기둥에 머리를 조아리는 어머니와 같은 간절한 마음으로 경쟁과 승진, 평판과 조직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서 '과연 나는 지금 성심을 다하여 재판하고 있는가'라고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 말이다.

'청송지본 재어성의.' 케케묵은 이 말이 그날따라 유독 머릿속을 맴돌았던 이유는 공관을 나설 때면 책임감으로 한없이 어깨가 처진다고 말하던 한 사람의 성의가 내게 닿아서였을까. 그건 잘 모르겠으나 그날 본 그의 어깨가 심하게 처져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박주영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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