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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는 AI도 '날씬한 20대 여성'이어야 하나...'제이나'가 던진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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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는 AI도 '날씬한 20대 여성'이어야 하나...'제이나'가 던진 질문

입력
2024.05.07 04:30
21면
0 0

제주도·상주시 잇달아 AI 아나운서 도입
긴 머리에 치마 입은 날씬한 20대 여성
①외모만 중시하는 성별 고정관념 답습
②전문 직업인 존중보다 '초대 가수' 활용
도청 내부 문제 제기에 "바지·안경 추가"

제주도청이 3월 도입한 AI 아나운서 '제이나'(왼쪽 사진)와 경북 상주시청이 지난달 도입한 AI 아나운서 '수니'. 각 지자체 유튜브 캡처

제주도청이 3월 도입한 AI 아나운서 '제이나'(왼쪽 사진)와 경북 상주시청이 지난달 도입한 AI 아나운서 '수니'. 각 지자체 유튜브 캡처

#. 제주도청은 3월 인공지능(AI) 아나운서 '제이나'를 도입했다. 긴 머리를 가슴까지 늘어뜨린 날씬한 20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늘 몸에 딱 붙는 치마를 입는다. 경북 상주시가 지난달 공개한 AI 아나운서 '수니'도 마찬가지다. 상주 특산품인 곶감을 모티브로 한 마스코트 '수니'를 의인화한 아나운서라는데, 동글동글한 마스코트의 특징은 온데간데없는 가녀린 20대 여성이다.

두 아나운서는 TV에서 자주 보는 '사람 아나운서'와 똑 닮았다. 그런데 AI 아나운서에게조차 여성에게 실력보다 빼어난 외모를 요구하는 비뚤어진 현실의 성별 고정관념을 그대로 담아야 하는 걸까.

경북 상주시가 특산품인 곶감을 형상화한 마스코트 '수니'(왼쪽 사진)와 이를 의인화한 AI 아나운서 '수니'. 상주시 유튜브 캡처

경북 상주시가 특산품인 곶감을 형상화한 마스코트 '수니'(왼쪽 사진)와 이를 의인화한 AI 아나운서 '수니'. 상주시 유튜브 캡처

#. 제이나의 주요 업무는 제주도 유튜브 채널에서 매주 한 차례 도정 뉴스를 전하는 것이다. 공무원 교육과 각종 행사 진행도 한다. 그런데 지난달 9일 도청 공무원들의 AI 동아리 전시회에서는 '초대 가수'로 나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제주도 유치를 염원하는 노래도 불렀다. 동아리 소속 공무원들이 딥페이크 기술과 AI 음악 생성 기술 등으로 만든 영상이다. 아나운서를 행사의 가수로 활용하는 건 AI니까 괜찮은 걸까.

지난달 9일 제주도청에서 열린 도청 공무원들의 AI 동아리 전시회 '챗GPT가 리스펙! 제주 속 APEC!’에서 제이나는 '초대 가수'로 등장해 APEC 유치를 염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제주도 유튜브 캡처

지난달 9일 제주도청에서 열린 도청 공무원들의 AI 동아리 전시회 '챗GPT가 리스펙! 제주 속 APEC!’에서 제이나는 '초대 가수'로 등장해 APEC 유치를 염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제주도 유튜브 캡처


일자리만 위협하는 게 아니다

제이나는 공개 후 많은 화제를 낳았다. 지방자치단체에서 도입한 최초의 아나운서였기 때문이다.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 게 본격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많았다. 제주도청이 비용 절감을 위해 아나운서 채용 대신 AI 개발·운영업체에 사용료 월 60만 원을 내고 제이나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나는 또 다른 질문도 남긴다. 과학기술은 더 많은 것을 상상하고 구현할 수 있음에도 왜 번번이 현실의 성별 고정관념을 답습하는지, 20대 젊은 여성이 필요에 따라 뉴스도 전했다가 노래도 부르는 것이 온당한지 말이다.

'친절과 돌봄'은 왜 늘 20대 여성 몫인가

제주시 AI 아나운서 '제이나'가 제주도청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

제주시 AI 아나운서 '제이나'가 제주도청 공식 유튜브 채널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모습. 유튜브 캡처

지자체들은 왜 AI 아나운서로 20대 여성의 모습을 택했을까. 제주도청 관계자는 "AI 운영업체에 있는 모델 중 한국인 남성 아나운서는 1명, 여성 아나운서는 4, 5명 정도여서 여성 중에서 골랐다"고 답했다. 제주도청과 같은 업체의 AI 아나운서를 사용 중인 상주시청 관계자는 "샘플 중 가장 친근한 이미지를 골랐다"고 말했다.

선택지 자체가 20대 여성으로 한정돼 있었다는 얘기다. 해당 업체인 AI파크 박철민 대표는 "실제 사람 모델을 활용해 AI 아바타를 만드는데, 아나운서로 활용 가능한 모델들이 제한적인 데다 아직 스타트업이라 모델 섭외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말했다. 업체는 실제 사람 모델을 촬영한 후 그래픽 기술 등을 기반으로 3D 가상인간을 만든다.

친절한 설명과 돌봄 기능을 제공하는 기술은 대개 젊은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2021년 성희롱 논란 등을 겪었던 AI챗봇 '이루다'도 20대 여자 대학생으로 설정됐고, 대부분의 음성인식·챗봇 AI는 젊고 친절한 여성의 목소리와 외모가 기본값이다. 이는 여성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강화할 우려가 크다. 임소연 동아대 기초교양대학 교수는 "이런 기술은 사회적으로 이상화되는, 굉장히 전형적인 여성성을 반영한다"며 "이런 여성성을 100% 가진 여성은 실제로 없는데도 AI나 로봇이 그대로 구현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고정관념이 물질화되고, 더욱 굳어진다"고 지적했다.

아나운서는 낡은 성별 고정관념이 가장 공고한 직종 중 하나다. 김수아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부교수는 “실제로 방송에서 남성 아나운서는 중년이 될수록 전문성을 인정받는 반면 여성 아나운서는 외모 중심으로 비쳐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이 등장한다”며 "지자체 AI 아나운서 이미지 역시 이런 고정관념이 반영된 것"이라고 말했다.

2021년 공개된 AI 챗봇 이루다. 스캐터랩 제공

2021년 공개된 AI 챗봇 이루다. 스캐터랩 제공


제주도 AI 아나운서 '제이나'(왼쪽 사진)와 경북 상주시 AI 아나운서 '수니'. 유튜브 캡처

제주도 AI 아나운서 '제이나'(왼쪽 사진)와 경북 상주시 AI 아나운서 '수니'. 유튜브 캡처


"초대 가수? 아나운서 직종 존중해야"

AI 아나운서를 초대 가수 등 다른 용도로 활용하는 것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여성 아나운서를 전문 직업인으로 인정하기보다 여성에 방점을 찍기에 이렇게 변형한다는 지적이다. 이혜숙 한국과학기술젠더혁신센터 소장은 "AI 아나운서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역할로 비치면 실제 아나운서들이 불편할 수 있다"며 "아나운서라는 역할을 줬으면 AI라 할지라도 그 직종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9일 제주도청에서 열린 도청 공무원들의 AI 동아리 전시회에서 '제이나'가 전시회를 소개하고 있다(위 사진).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제주도 제공

지난달 9일 제주도청에서 열린 도청 공무원들의 AI 동아리 전시회에서 '제이나'가 전시회를 소개하고 있다(위 사진). 오영훈 제주도지사가 전시를 둘러보고 있다. 제주도 제공


제주도 "바지·안경 업그레이드 예정"

제주도청 내부에서도 제이나 외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었다. 제주도청 관계자는 "성평등여성정책 부서에서 제이나를 좀 더 중성적인 모습으로 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며 "바지를 입거나 안경을 쓴 모습도 구현할 수 있게 다음 달 말 업그레이드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AI 운영업체 박 대표는 "앞으로 AI 아바타를 만들 때 성별·체형·연령 다양성을 반영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장은 "우리 사회에서 주요 의사 결정을 하는 자리에 여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의사 결정 단계에 여성이 참여해야 이런 시각이 반영될 수 있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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