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기우제 의식에 담긴 인본주의

입력
2024.05.06 04:30
23면
0 0

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산제바위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 산제바위에서 기우제를 올리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입하가 지났으니 이제 본격적인 여름이다. 옛날에는 이 무렵이면 비 소식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모내기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고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에 기도하는 수밖에. 그래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등록'이라는 책이 있다. 1636년부터 1889년까지 254년간 조선 왕조가 기우제를 준비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공문서를 옮겨 적은 책이다. 기우제뿐만 아니라 장마가 그치기를 기원하는 기청제, 이듬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기설제와 기곡제, 강우량을 측정한 수표 기록까지 망라했다. 오늘날에도 다각도로 활용 가능한 기상 자료다.

가뭄이 심각하면 기우제를 지내고, 사흘이 지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기우제를 반복한다. 순서와 장소는 법으로 정해져 있다. 1차는 북한산, 남산, 한강, 2차는 용산강, 저자도, 3차는 비, 바람, 구름, 우레를 맡은 신을 모신 풍운뇌우단과 산천우사단이다. 4차는 북교, 사직, 5차는 종묘다. 그래도 비가 내리지 않으면 다시 한 바퀴 돈다. 상황이 심각하면 주술적 수단까지 동원한다. 범 머리를 한강에 담그고, 아이들을 시켜 도마뱀을 넣은 항아리를 두드리게 하고, 흙으로 용 형상을 빚어 제사를 지낸다. 비를 내리게 만드는 용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이러면 비가 내린다고 믿어서가 아니다. 비가 내릴 때까지 민심을 달래는 방법이었다.

조선시대 재해 대책이 기우제뿐이었다고 오해하면 곤란하다. 오히려 '기우제는 말단적인 일'이라는 것이 일관적인 입장이었다. 재해 대책의 근본은 통치자의 반성과 고통 분담이었다. 기우제에 앞서 국왕의 처소를 옮기고, 유흥을 멈추고, 술과 담배까지 금지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국왕의 자유를 제한하고 욕구를 억제하여 정치행위에 대한 반성을 촉구했다. 사대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연히 사회적으로 자숙하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소결', 여론에 귀를 기울이는 '구언' 역시 재해 대책의 일환이었다. 소결과 구언은 소외계층을 보살피고 여론을 청취해 사회적 통합을 도모하기 위한 조처였다. 이 밖에 빈민을 구제하는 '진휼', 세금을 면제하거나 경감하는 '견감' 등의 조처도 시행했다. 기우제는 이 수많은 재해 대책의 하나에 불과하다.

기우제는 미신적, 주술적 행위로 폄하할 수 없다. 기우제는 대처 불가능한 자연재해에 대응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는 인본주의적 관념에서 비롯된 의례다. 기상이변으로 자연재해가 빈발하는 오늘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재해 대책의 근본이 반성과 고통 분담이라는 점도 바뀌지 않았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