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노동 현실 쓰는 '월급사실주의'의
앤솔러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 이어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 한국 사회의 노동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겠다는 규칙을 세운 작가들의 모임, '월급사실주의 동인'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노동절(5월 1일)에 두 번째 앤솔러지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을 냈다. 지난 한 해 한국 노동시장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노동자의 권익과 복지 향상과 인간다운 삶 구현이라는 노동절 제정 의도를 채 따라가지 못하는 한국의 노동 현실을 담은 소설집을 통해 읽어본다.
8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노동자는 근로기준법의 온전한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지방 방송사 계약직 아나운서, 어린이 공부방 교사, 식당 수습직원, 화장품 프랜차이즈 본사 영업 직원과 가맹점주, 간호조무사, 쿠팡이 모티브임이 분명한 ‘구빵’ 일용직 아르바이트, 프리랜서 통역가, 비건 식당 매니저까지. 법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울며 와사비 핥는 심정으로” 부당한 규칙을 감내해야 하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모습이다.
지민과 혜심, 지윤, 세준…‘우리’의 이름
각기 다른 상황에 부닥친 노동자가 등장하는 수록작들은 삶에 필수불가결한 밥벌이를 위해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헤아린다. 아버지의 생신 모임을 잡아둔 날과 겹친 갑작스러운 ‘땜빵’ 행사 기회에 “네, 마침 그날 있던 행사가 취소됐어요. 좋아요”라고 대답해야 하는 계약직 아나운서 ‘지민.’(‘오늘도 활기찬 아침입니다’·남궁인)
넉 달째 돈을 내지 않으면서 공부방을 줄기차게 찾는 제자 ‘준용’을 보며 “아무리 예뻐했던 아이라도, 손톱이 온전치 않아졌다면 그 아이를 밉살스럽게 생각하게 되는 건 언제나 시간문제였다”라고 여기며 그를 미워하는 교사 ‘혜심.’(‘피아노’·손원평).
또 사기로 밝혀진 가상화폐에 “이 은행 저 은행에서 현금 서비스로 달달 긁어모은 오백만 원”을 날리고 구빵에서 일하면서도 한심하고 불쌍한 노동자들과 “난 다르다”고 선을 긋는 대학생 ‘지윤’과 ‘세준’까지.(‘빌런’·천현우)
이들은 노동하는 인간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하는 인간성조차 사치가 된 오늘을 상징한다. 이런 현실을 두고 ‘식물적 관상’(한은형)은 패션 비건 식당을 운영하는 ‘보이사’의 입을 빌려 묻는다. “혐오 발언도 금지, 차별도 금지인 이 시대에 혐오와 차별을 역으로 활용하겠다는 게 문제가 될까? 법과 제도가 엉망진창인 나라에서 그걸 활용하는 게 문제가 될까?”
한국 문학은 왜 먹고사는 얘기 안 할까
지난해 나온 첫 책(‘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이 잘되면 멤버를 충원해 ‘월급사실주의 2024’, ‘월급사실주의 2025’, ‘월급사실주의 2026’ 등으로 작업을 이어나가겠다고 한 작가들의 계획은 이로써 현실이 됐다. 월급사실주의는 “왜 한국 문학은 먹고사는 이야기를 안 하나”라는 장강명 작가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동인이다. 가입 절차나 정기적인 모임은 없지만, 집필 시 몇 가지 규칙은 지켜야 한다. ①한국 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②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③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은 그렇기에 기상천외하거나 대단한 반전을 지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그저 한 번쯤은 직접 겪었거나, 주변에서 일어났을 만한 일하는 사람의 일상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흡입력은 어쩌면 “성의와 의리와 잔정의 크기가 모두 돈으로 환산 가능한 시절”의 지긋지긋한 일터로 매일매일 향하는 존재가 ‘나’만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표제작인 임현석 작가의 ‘인성에 비해 잘 풀린 사람’의 화장품 프랜차이즈 본사 영업부 직원인 '진영'이 서투른 초보 가맹점주 ‘선영’에게 건넨 덤덤한 말은 모든 일하는 존재들에게 위로가 된다. “흔하다면 흔하고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 일어날 거예요. (...) 그땐 너무 놀라지도 말고, 마음 상하지도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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