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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5년, 혼란 여전···"자기결정권 우선" 54% vs "태아 생명권" 35%

입력
2024.04.27 04:30
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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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송정근 기자

그래픽=송정근 기자

현재 대한민국에서 낙태(이하 임신중단)는 합법일까? 불법일까? 2019년 4월 헌법재판소는 낙태죄(형법 269조)가 헌법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형법상의 낙태죄는 폐지됐지만, 모자보건법과 모자보건법 시행령에는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 일부 예외적인 경우에 한해 임신중단을 허용한다는 법조문이 여전히 남아 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임신중단에 관한 법령이 정리되지 않아 혼란은 여전하다. 그동안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개정안이 다수 발의됐지만, 사회적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채 여전히 계류 중이다.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팀은 지난 3월 8~11일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 조사를 진행했다.

‘임신 7주 이하’의 배아도 생명체 54%

임신 단계 중 어느 시기부터의 태아(배아)를 생명체로 보아야 하는지 물었다. 전체의 54%는 임신 7주 이하도 생명체라고 보고 있다. 임신 7주 이하의 수정체는 태아라고 부르지 않고 ‘배아’라고 칭하며 크기는 3cm, 무게는 1g 정도다. 임신 8~11주는 초음파로 심장박동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기이며, 이 시기부터 생명체로 본다는 응답은 23%이다. 태아를 생명으로 보는 시기가 ‘임신 12~15주’라는 응답은 12%, ‘임신 16~23주’라는 응답은 6%이다. 임신 24주가 지난 태아는 모체 밖에서 생존이 가능해지는데, ‘임신 24주 이후’에야 태아를 생명체로 볼 수 있다는 사람은 전체의 6%에 불과했다. 모체 밖에서 생존이 가능한 시점보다는 수정(受精)이 이뤄진 시점이나 심장이 뛰는 시점부터를 생명체로 인식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임신중단과 관련한 논쟁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임신중단을 둘러싸고 두 가지의 가치가 충돌한다. 태아의 생명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비록 세상에 나오지 않았지만 태아도 하나의 생명체로 보아 존엄한 생명의 가치를 수호하고자 한다. 한편 자기결정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임신을 지속할지에 대한 결정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자기결정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본다. 조사 결과 태아의 생명권이 더 우선시돼야 한다는 사람은 35%,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더 우선시돼야 한다는 사람은 54%로 자기결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임신중단에 대한 인식은 태아의 생명권과 자기결정권 중 어떤 가치를 더 지지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을 보인다. ‘임신중단의 법적 허용은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일이다’, ‘임신중단의 법적 허용은 불법적이고 안전이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시술(수술) 및 약물로부터 여성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다’와 같이 임신중단 허용에 대한 긍정적 측면을 언급하는 진술에 대해서는 전체의 4분의 3 이상이 동의하며, 특히 자기결정권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10명 중 9명이 동의한다.

하지만 임신중단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진술에 있어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임신중단의 법적 허용은 우리 사회가 생명을 가볍게 여긴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진술에 대해 태아의 생명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는 68%가 동의한 반면, 자기결정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는 35%만이 동의한다. ‘임신중단이 합법이라고 하더라도 임신중단은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행위이다’라는 진술에 대해서도 태아의 생명권을 보다 지지하는 사람 중에서는 76%가 동의한 반면, 자기결정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중에서는 49%만이 동의한다.

임신중단 ‘특정한 경우에 한해서만 허용해야’ 66%

임신중단이 어느 범위까지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는지 물었다. 전체의 66%는 특정한 경우에 한해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경우라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람은 20%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허용하지 않는 편이 바람직하다는 사람은 10%로, 어떠한 경우라도 허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응답보다 10%포인트 낮다.

임신중단 관련 법률 개정안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쟁점은 임신중단의 허용 범위다. 이제까지는 모자보건법 제14조 및 모자보건법 시행령 제15조에 근거하여 본인이나 배우자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정신장애나 신체질환이 있는 경우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인척 간 임신인 경우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거나 해칠 우려가 있는 경우 중 하나에 해당하면서 임신 24주 이내인 경우에만 법적으로 임신중단이 가능했다. 이들 각각의 사유를 제시하고 임신중단 허용 동의 여부를 확인한 결과, 모든 사유에 대해 임신중단을 23주 이내까지, 혹은 주수와 관계없이 전면 허용해야 한다는 여론이 80%를 넘는다.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사회적‧경제적 사유에 대해서는 대체로 절반가량이 임신중단을 허용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모자보건법상 허용 사유와 비교하면, 23주 이내까지만 임신중단을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이 임신 주차와 상관없이 허용해야 한다는 응답보다 더 많으며, 아예 임신중단을 허용할 수 없다는 응답도 적지 않다. ‘허용 불가’ 응답은 태아의 성별이 부모가 원하는 성별이 아닌 경우(71%), 자녀 계획에 어긋난 임신인 경우(43%), 출산 및 육아를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31%), 파트너와 결별하게 된 경우(29%), 미성년자의 임신인 경우(16%)의 순으로 높다.


의료인의 임신중단 진료거부권 인정해야 한다 59%

임신중단의 허용범위 이외에, 법률 개정안의 주요 쟁점으로는 임신중단 진료가 가능한 의료기관의 범위, 의료인의 임신중단 진료거부권, 의료보험 적용 여부, 낙태약 허가 여부 등이 있다. 임신중단 진료가 가능한 의료기관의 범위와 관련하여 두 가지 방안이 있다. 하나는 모든 의료기관에서 진료가 가능하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정된 의료기관에서만 임신중단 관련 진료‧시술을 받도록 하는 것이다(2020년 11월 조해진 의원, 2020년 12월 서정숙 의원이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 후자의 방식처럼 별도로 지정된 의료기관에서만 임신중단 진료‧시술을 가능하게 할 경우, 임신중단 관련 진료를 원치 않는 의료기관의 뜻을 반영할 수 있다. 두 가지 방안 중 임신중단의 진료‧시술 등이 가능한 병원을 별도로 지정하여 운영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사람은 58%로 더 우세하다. 모든 병원에서 임신중단 진료‧시술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사람은 32%이다.

지정 병원 형태로 운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더 우세한 것은 의료인이 임신중단 진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보는지 여부와 관련이 있다. 전체 응답자의 59%가 의료인이 임신중단 진료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는데, 이 중 67%가 지정된 병원에서만 임신중단 진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답했다. 한편, 전체 응답자의 33%는 의료인의 진료거부권 인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 집단에서는 지정된 병원에서만 진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 48%, 모든 병원에서 임신중단 진료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보는 사람이 47%로 의견이 양분된다.

2021년 1월 남인순 의원이 대표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임신중단의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포함되어 있다. 조사 결과, 임신중단에 의료보험을 적용하는 데 동의하는 사람은 53%,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40%로 의견이 갈려 사회적 합의가 좀 더 필요해 보인다. 캐나다, 태국, 우즈베키스탄 등 해외 약 60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경구용 낙태약(미프진, 미소프로스톨 등)을 한국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입 찬성이 57%로 반대(28%)에 비해 두 배가량 높다. 임신중단이 이뤄지기 전 24~72시간의 숙려 기간을 법적으로 의무화하는 것에는 전체의 82%가, 학교교육에서 피임교육을 의무화하는 것에도 전체의 87%가 동의한다.

이번 조사에서, 3명 중 1명은 낙태죄가 헌법재판소로부터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것을 몰랐다고 답했다.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만 5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3분의 1이 이를 모른다는 것은 법 개정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법은 사회 구성원의 행동양식의 준거가 된다. 임신중단이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놓임에 따라 의료현장은 혼란스럽고 편법적인 임신중단 등으로 여성의 건강권이 위협받고 있다. 생명의 무게는 무겁지만 임신과 출산을 스스로 선택할 권리 역시 중요하다. 임신중단과 관련한 법 규정을 조속히 마련하되 생명을 존중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역시 함께 정비돼야 한다.



송승연 한국리서치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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