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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한 통에 목숨 하나

입력
2024.04.14 22: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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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군대에서 훈련받을 때 일이다. 하루는 산을 넘어 사격장으로 행군했다. 경북의 척박한 야산은 4월에도 얼어 있었다. 실탄 사격을 마치고 탄피 숫자를 세는데 하나가 없다고 했다. 사격장을 여러 번 뒤져도 탄피는 나오지 않았다. 날이 추워지고 어두워지자 인솔 장교는 윗선에 보고를 하고, 어쩔 수 없이 부대로 돌아간다고 했다. 다시 2시간 산길을 넘어 부대 근처까지 왔는데, 인솔 장교는 더 윗선으로부터 전화로 질책을 받았다. 사라진 탄피를 끝까지 찾아야 한다고 했다. 군대가 처음이었던 우리는 ‘아니, 그 쏘고 남은 쇳조각이 뭐라고 이 난리인가’ 했다. 다시 산길을 넘는 길은 칠흑 같은 야음이었다. 사방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다가 겨우 다시 사격장에 도착했다. 좋은 길로 지프차를 타고 도착한 연대장은 늠름한 자세로 온몸이 언 우리 앞에 서더니 짧은 연설을 했다.

"탄피 하나에 목숨 하나가 달려 있다. 그 탄피를 찾을 때까지 여기서 나가지 못한다."

사격장에 불을 켜고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렇게도 찾을 수 없었던 그 조그만 쇳조각이 어떤 전우의 윗주머니에서 발견됐다.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를 방불케 하는 환호성과 박수의 시간이 지나가고, 원망의 표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연대장은 “전우의 실수는 우리 모두의 실수”라며, “절대 저 친구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그 군의관 장교 후보생은 ○○대 병원 ○○과 출신이라고 했다. 이 모든 소동을 전우를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네 번째로 산길을 넘어 돌아오는 길에 잊었어야 했다. 하지만 그 밤이, 그 달빛이, 그 얼굴이, 그 소속 병원이 아직도 잊히지가 않는다.

탄피 하나에도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면, 전화 한 통에도 사람 목숨이 달려 있다. 적절한 때에 바른 결정을 하지 못하면 억울하게 고통받는 사람이 생긴다. 전공의 시절 어떤 후배가 당직실에서 넥타이를 머리에 맨 채로 자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회식의 즐거움을 가득 안고 잠을 자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출기를 깔고 잘까 봐, 머리에 맨 넥타이 속에 호출기를 넣고 눈을 붙이는 것이라고 했다. 의사 면허를 따고, 외과를 전공하면서 호출기와 전화기는 늘 곁에 있었다. 샤워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에는 갖은 파형의 소리가 담겨 있는데, 그중에 내 벨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아 샤워를 멈추고 전화기를 들여다보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벨소리는 전혀 반갑지가 않다. 특히 밤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는 대체로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하는, 불길함 가득한 전주다. 새벽이나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혹시 밤에 받지 못한 연락은 없었는지 제일 먼저 전화를 살펴본다.

한국전쟁이 일요일 새벽이라는 평온한 시간에 시작된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발발했다고 배워 알고 있다. '일요일'에 일격을 당한 '억울한' 역사를 상기시키는 말이다. 전쟁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필수 의료는 일요일도 없고 새벽도 없다. 외과 의사들의 부정맥이 유의미하게 많다는 최근 논문을 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라는 직업은 본인의 근심에 더해 다른 사람의 근심까지 천형처럼 떠안고 산다. 나는 이 불편함이 '억울함'이 아니길 바란다. 대신, 고통받는 존재의 아픔에 늘 반응하고 있다는 따뜻한 자부심으로 느껴지길 바란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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