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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네 개라고 기죽을 거 없잖아?"...어느 풀벌레의 꿈

입력
2024.04.12 17:0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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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 작가 그림책 '풀벌레그림꿈'

풀벌레그림꿈·서현 지음·사계절출판사 발행·84쪽·1만8,000원

풀벌레그림꿈·서현 지음·사계절출판사 발행·84쪽·1만8,000원

‘풀벌레그림꿈’은 생김새부터 심상치 않다. 사극에서 보던 ‘옛날 책’을 닮았다. 책 옆면에 으레 있는 책등이 없어 종이와 종이를 엮은 실이 드러나 있다. 두꺼운 표지에는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동그란 구멍이 뚫려있다. 낯선 형태와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구멍은 독자를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가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책에는 자꾸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풀벌레가 나온다. 풀벌레는 힘겨워한다. “애고고고고 사람이라는 거, 참 어렵다.” 이유는 ‘다리’가 네 개(팔 두 개, 다리 두 개)여서다. 그런데 꿈과 현실, 풀벌레와 사람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진다. 풀벌레가 사람이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사람이 풀벌레가 되는 꿈을 꾸는 건지 알 수 없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모르겠다던 장자의 ‘호접몽’과 비슷하다. 식물들도 윤곽선 없이 번진 듯한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서현 작가가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떠올린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풀벌레그림꿈'에는 초충도 장면들도 등장한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서현 작가가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고 떠올린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풀벌레그림꿈'에는 초충도 장면들도 등장한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이 경계 없는 세계에서도 비교적 명징해 보이는 것은 있다. 기이한 꿈 때문에 입맛이 없을 때 함께 수박을 먹으며 얘기 나눌 친구 한 명으로도 삶은 꽤 괜찮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고작 다리 네 개로 너무 많은 것에 짓눌려 살 필요는 없다는 것.

이 작품은 서현 작가가 풀과 곤충을 그린 신사임당의 ‘초충도’를 보다가 떠올린 이야기라고 한다. 최근 ‘호랭떡집’으로 ‘아동문학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한 그의 새 작품이다. ‘간질간질’ ‘커졌다’ 등 작가의 이전 작품을 본 독자들은 조금 놀랄 수도 있다. 화려한 색감과 깨알 같은 유머로 지면을 빈틈없이 채우며 경쾌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던 그가 이번엔 최소한의 색깔과 그림, 최대한의 여백으로 느리고 조용하게 말을 걸기 때문이다.

풀벌레는 친구 쇠똥벌레와 수박을 나눠 먹으며 기이한 꿈 얘기를 한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풀벌레는 친구 쇠똥벌레와 수박을 나눠 먹으며 기이한 꿈 얘기를 한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풀벌레와 쇠똥벌레. 신사임당은 '초충도'에서 쇠똥벌레를 즐겨 그렸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풀벌레와 쇠똥벌레. 신사임당은 '초충도'에서 쇠똥벌레를 즐겨 그렸다. 사계절출판사 제공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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