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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하지 않고 드러눕기

입력
2024.04.08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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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편집자주

새로운 한 주를 시작하면 신발 끈을 묶는 아침. 바쁨과 경쟁으로 다급해지는 마음을 성인들과 선현들의 따뜻하고 심오한 깨달음으로 달래본다.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로비 계단에 새겨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그림. 뉴시스

경기 과천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로비 계단에 새겨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그림. 뉴시스

고려시대 개성에 왕륜사라는 거대 사찰이 있었다. 승려가 1,000명이 넘었지만 제대로 된 승려는 하나도 없고, 모두 탐욕스럽고 음란했다. 그중 한 사람이 특히 심했다. 다른 승려들이 모여 그를 내쫓기로 결정했다. 쫓겨날 위기에 처한 승려가 말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절을 닫아야 할 거요." 자기 치부를 문제 삼으면 다른 승려들의 치부도 공개하겠다는 협박이었다. 승려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왕륜사 승려들은 타락한 와중에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나 보다. 내게 찔리는 데가 있으면 남의 허물을 탓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지금의 진흙탕 싸움 같은 선거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양심이다. 오죽하면 ‘똥 묻은 개가 똥 묻은 개를 나무란다’는 소리가 나올까. 중립을 지켜야 할 언론조차 실망스럽다. 노골적으로 한쪽을 옹호하거나 공격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악 척결을 위해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며 은근슬쩍 한쪽을 편든다. 속 보이는 수작이다.

투표권을 얻은 이래 지금까지 25년 넘게 한 번도 빠짐없이 투표에 참여했다. 마음에 드는 후보가 없더라도 그나마 나은 후보를 억지로 골라 표를 던졌다. 이제는 한계다. 이번 선거는 유난히 선택의 폭이 좁다. 범죄자와 범죄 혐의자, 부동산 투기꾼과 음주운전자, 탈세범과 막말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이 꼴을 보려고 그동안 열심히 투표했는지 자괴감이 든다.

수많은 후보 중에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당을 선택하자니 도저히 답이 없다. 거대 양당은 서로 다른 점보다 같은 점이 많다. 양당 아닌 제3세력을 지지하는 것도 망설여진다. 선거가 끝나면 양당으로 돌아갈 사람들이 급조한 정당이거나 극단적 이념을 추종하는 정당뿐이다. 이 상황에서 한쪽을 편들어봤자 결국 양당 체제의 고착화에 기여할 뿐이다. 지금까지 시키는 대로 성실히 투표한 나 같은 평범한 소시민이야말로 어쩌면 양당 독주 체제의 공범자일지도 모르겠다.

이 점에서 청년 세대의 저조한 투표율은 나름의 합리적 이유가 있다.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다. 엄격하고 공정한 잣대를 적용하는 그들의 눈높이에 맞는 후보가 없어서다. 반공 이념에 찌들거나 운동권 향수에 젖어 한쪽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기성세대와는 다르다. 그러니 나도 이번에는 투표하지 않고 드러누울까 한다. 청년들이 각박한 현실에 자포자기하며 비혼과 비출산을 선택하고 드러눕자 온갖 대책이 쏟아져 나오지 않았는가. 투표율이 궤멸적 수준으로 떨어져 정치인의 정당성과 대표성이 땅에 떨어지면 뭔가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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