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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이 까맣도록… 왕희지체는 어떻게 완성됐나

입력
2024.04.06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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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절강고진 ⑧사오싱(紹興)

중국 사오싱 서성고리에 황희지가 쓴 난정서 석판이 세워져 있다. ⓒ최종명

중국 사오싱 서성고리에 황희지가 쓴 난정서 석판이 세워져 있다. ⓒ최종명

동진(東晉) 시대인 353년, 문인이자 고관대작 41명이 회계(會稽)의 한 정자에 모였다. 지금의 사오싱(紹興)이다. 질병 퇴치를 위한 제사를 지내고 음주 후 너도나도 시심(詩心)을 드러냈다. 서성(書聖) 왕희지가 서문을 썼다.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로 평가되는 난정서(蘭亭序)다. 산둥 린이(臨沂) 출신인 왕희지는 22세에 출사(出仕)했다. 당시 회계군 내정을 담당하는 관리였다. 사오싱에 왕희지를 기념한 마을이 있다. 서성고리(書聖故里)로 간다.

난정서에는 갈 지(之) 자가 20번 등장하는데 모두 서로 다른 필법이다. ⓒ최종명

난정서에는 갈 지(之) 자가 20번 등장하는데 모두 서로 다른 필법이다. ⓒ최종명


담벼락마다 왕희지 글씨, 서성고리

두루마기 모양의 돌에 붓을 든 왕희지와 함께 난정서가 적혀 있다. 28행 324자에 이른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본다. 여럿이 모여 순서대로 읊은 바를 모았다는 서문이다. ‘비록 세상이 달라지고 세태가 변할지라도(雖世殊事異), 마음에 흥취가 생기는 까닭은(所以興懷), 그 이치가 하나기 때문인데(其致一也), 후세에 살펴보는 사람도(後之覽者), 역시 이 글에 대한 감회가 있으리라(亦將有感於斯文)’로 마친다. 서체는 정말 현란하다. 20자나 쓴 갈 지(之)의 서체가 하나같이 서로 다른 필법이다. 명필의 기운이 느껴진다. 손으로 짚어가며 살피니 재미있다.

사오싱 서성고리의 묵지. ⓒ최종명

사오싱 서성고리의 묵지. ⓒ최종명


서성고리에서 아이들이 서예 연습을 하고 있다. ⓒ최종명

서성고리에서 아이들이 서예 연습을 하고 있다. ⓒ최종명

묵지(墨池) 연못이 있다. 일곱 살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서예가였던 아버지가 전해준 비장의 필법으로 연못 옆에서 온종일 연습을 했다. 황혼이 지고 여명이 떠오를 때까지 쓰고 또 썼다. 붓을 연못에 헹구니 온통 까맣게 변했다. 서예의 성인에 어울리는 전설이다. 물고기가 헤엄치고 물풀이 자란다. 서예 가게의 창문이 열려 있다. 붓글씨 연습하는 아이들의 반듯하게 움켜쥔 손길이 대견하다.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이모첩. ⓒ최종명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이모첩. ⓒ최종명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이세첩. ⓒ최종명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이세첩. ⓒ최종명

골목 담장에 왕희지 작품이 가득하다. 회백색 담장을 화선지로 품격 있게 수놓고 있다. 6행 42자인 이모첩(姨母帖)이 보인다. 이모가 상을 당해 비통한 심정을 참을 수 없다는 편지다. 머리를 땅에 닿도록 숙이고 절을 한다는 돈수(顿首)를 필법을 바꿔가며 반복하고 있다. 절친인 세안과 세만 형제에게 보낸 이세첩(二謝帖)도 있다. 요즘 자주 보지 못했다는 면미비면(面未比面)에 눈길이 간다. 두 면(面)도 서로 다르다. 왕희지의 손길이 마을 한가득하다.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최종명

서성고리 주택 담벼락에 쓰여진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최종명

예술품 감상에 열정이던 건륭제가 소장했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만난다. 3행 24자는 행서이고 수신인으로 추정되는 산음장후(山陰張侯)는 예서다. 대설이 그쳐 유쾌한 마음으로 안부를 묻는 내용이다. 지금 전해지는 왕희지의 서체는 대부분 당나라 시대 모본(摹本)이다. 난정서조차 진위 여부가 따라다니는데 진본에 가까운 보물로 알려진다. 1924년 마지막 황제 푸이가 고궁을 쫓겨날 때 빼돌리려 했다. 수색에 걸려 실패했다. 장제스가 타이베이로 가져갔다. 서체 앞에 당당히 조각상으로 남아있다. 1,700년이나 지났어도 여전히 존경의 대상이다.

사오싱 서성고리의 차이위엔페이 고거. ⓒ최종명

사오싱 서성고리의 차이위엔페이 고거. ⓒ최종명

뒷산 즙산(蕺山)에 명나라 시대부터 서원이 있었다. 명나라 유종주와 청나라 초기의 황종희, 후기의 범문란을 비롯해 대학자들을 배출했다. 1916년부터 11년 동안 베이징대학 총장을 역임한 차이위안페이의 고향이다. 마오쩌둥이 학계태두(學界泰斗)이자 인세해모(人世楷模)라 칭찬했다. 학계의 대가이자 세상의 모범이란 칭찬이다. 대문의 서체는 당대 서예가인 사멍하이의 솜씨다. 무엇보다 사오싱이 낳은 인물로 루쉰을 뺄 수 없다.

책은 마음으로, 눈으로, 입으로 읽어야

사오싱 루신고리 입구 담장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최종명

사오싱 루신고리 입구 담장에 그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다. ⓒ최종명


사오싱 루쉰고리 입구에 아이들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최종명

사오싱 루쉰고리 입구에 아이들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최종명

루쉰고리(魯迅故里)로 간다. 담배 연기를 뿜고 있는 초상화가 반겨준다. 오봉선 오가는 수향도 담고 있다. 흑백 판화 같은 분위기의 담장이다. 1881년 출생 당시 루신의 이름은 저우장서우(周樟壽)였다. 1898년 난징의 군사학교에 들어가면서 저우수런(周樹人)으로 개명한다. 1918년 최초의 현대문학이라 불리는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한다. 이때 어머니의 성을 따라 루쉰을 사용한다. 아이들 3명의 조각상이 있다. 오른쪽에 루쉰에 앉았다. 왼쪽에 모자 쓰고 앉은 아이는 소설 ‘고향(故鄉)’에 나오는 친구 윤사다. 서 있는 아이는 루쉰의 학동이다.

사오싱의 루쉰고리 루쉰조거 대문. ⓒ최종명

사오싱의 루쉰고리 루쉰조거 대문. ⓒ최종명


루쉰고리 루쉰조거의 덕수당 편액. ⓒ최종명

루쉰고리 루쉰조거의 덕수당 편액. ⓒ최종명

먼저 조거(祖居)를 찾는다. 건륭제 시대인 1754년에 건축한 저택이다. 한림(翰林)이란 편액이 걸려 있다. 황제에게 강의를 하거나 조서를 꾸미는 한림원에서 서길사(庶吉士)를 역임한 할아버지 주복청의 명성이다. 대문을 지나니 덕수당(德壽堂)이다. 손님을 접대하거나 혼례와 장례를 치르는 대청이다. 자세히 보면 덕(德) 자의 심(心) 위에 가로 획(一)이 없다. 집안에 은덕이 부족해 더 수양하려는 뜻이라는 비아냥이 있다. 사실 고어에서 획이 있건 없건 모두 사용했다.

루쉰고리 루쉰조거의 향화당. ⓒ최종명

루쉰고리 루쉰조거의 향화당. ⓒ최종명

제사를 지내는 향화당(香火堂)이 이어진다. 할아버지와 본처인 손씨와 후처인 장씨가 있다. 덕행과 행운이 오래 지속되라는 덕지영형(德祉永馨)이 보인다. 친할머니 손씨는 루쉰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유머 많고 다정다감했던 계조모 장씨를 친할머니로 알고 살았다. 민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많이 전해줘 루쉰의 감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루쉰고리 루쉰조거 수방의 자수. ⓒ최종명

루쉰고리 루쉰조거 수방의 자수. ⓒ최종명

긴 복도를 따라가면 침실이다. 서화실과 규방도 나온다. 수방(繡房)에는 꽃을 꽂은 화병과 화로와 노리개를 수놓은 자수가 보인다. 악기를 연주하는 방인 금실(琴室)도 있다. 모형의 아가씨가 전통 옷을 입고 연주하고 있다. 불당(佛堂)과 전고(典庫)도 있다. 주방기구가 전시돼 있다. 식구가 꽤 많았던지 아궁이가 아주 큼직하다.

루쉰고거 입구. ⓒ최종명

루쉰고거 입구. ⓒ최종명

루쉰이 태어나고 살던 고거(故居)로 간다. 청나라 광서제 시대인 1820년에 조거 서쪽에 건축했다. 구조가 엇비슷하다. 할아버지의 후광을 받아 부유하게 살았다. 아버지가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관원에게 손을 쓰다 들통났다. 관리였던 할아버지는 부정행위로 투옥돼 8년형을 받았다. 아픈 가슴을 술로 달래던 아버지는 사망했다. 병마에 시달리다 돌팔이 의사의 오진으로 36세에 요절했다. 한순간에 가세가 기울었다.

루쉰고거의 덕수당. ⓒ최종명

루쉰고거의 덕수당. ⓒ최종명


루쉰고거의 침실. ⓒ최종명

루쉰고거의 침실. ⓒ최종명

조거와 마찬가지로 본당은 덕수당이다. 명문 가문이 순식간에 무너지다니 은덕이 부족해 가로 획 하나를 뺐다는 소문이 날 만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봉건 왕조도 문을 닫았다. 여섯 친족이 함께 모여 살았기에 꽤 넓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루쉰 침실이 나온다. 1910년대 고향으로 돌아와 3년 동안 교편을 잡을 때 머물렀다.

루쉰고거의 한여소게. ⓒ최종명

루쉰고거의 한여소게. ⓒ최종명

구석구석을 보다 복도 따라 후원의 한여소게(閒餘小憩)에 이른다. 산뜻한 예서체로 조그맣게 또박또박 적혀 있다. 분위기만큼 운치 있다. 태호(太湖)에서 나오는 기석(奇石)이 놓여 있다. 부잣집 저택의 상징과도 같은 돌이다. 앞은 연못이고 나무로 무성하다. 물속으로 햇살이 스며들어 흔들리는 낙엽이 선명하게 보인다. 이름처럼 한적하고 여유로운 휴게 공간이다. 차라도 한잔 마시면 금상첨화일 듯하다.

루신고거의 백초원. ⓒ최종명

루신고거의 백초원. ⓒ최종명

뒷문으로 나가니 백초원(百草園)이다. 루쉰이 동심을 키우던 놀이터다. 세태의 비정을 느끼고 18세에 떠날 때까지 추억의 장소다. 남부럽지 않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1926년에 ‘백초원에서 삼미서옥까지(从百草园到三味书屋)’라는 수필을 발표했다. 백초원과 더불어 지내던 이야기가 전반부다.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피했고 겨울이면 눈밭에서 새를 잡기도 했다. 귀뚜라미 잡고 뽕나무 오디를 캤다. 복분자 따고 하수오를 뽑으며 놀았다. 후반부는 서당에서의 생활이다.

루쉰고리의 삼미서옥 대문. ⓒ최종명

루쉰고리의 삼미서옥 대문. ⓒ최종명


사오싱 루쉰고리의 삼미서옥. ⓒ최종명

사오싱 루쉰고리의 삼미서옥. ⓒ최종명

도랑 돌다리 건너에 삼미서옥이 있다. 가늘게 자른 대오리를 엮은 문이 나타난다. 검은 옻칠이 벗겨져 약간 붉은빛을 띤다. 대문을 들어서니 서당이 보인다. 훈장이던 수경오 선생 초상화가 놓여 있다. 엄하기로 유명했던 사숙에서 루쉰은 열두 살부터 열일곱 살까지 학문을 익혔다. 왼쪽 구석에 루쉰이 앉던 책걸상이 있다. 고개 들이밀고 인증 사진 찍느라 모두 경쟁이다.

루쉰고리 삼미서옥의 지평전과 삼도서첨. ⓒ최종명

루쉰고리 삼미서옥의 지평전과 삼도서첨. ⓒ최종명

반질반질한 벽돌인 지평전(地坪磚)이 있다. 물과 붓으로 서법을 익히도록 제자를 훈련했다. 누구나 붓글씨를 써봐도 된다. 루쉰이 만들었다는 삼도서첨(三到書簽)도 소개하고 있다. 종이를 접어서 만든 책갈피다. '책은 마음으로 읽고,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어야 한다'는 뜻인 독서삼도심도안도구도(讀書三到心到眼到口到)다. 눈이나 입보다 마음으로 숙지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후학 양성에 신명을 바친 송나라 성리학자 주희의 훈학재규(訓學齋規)에 나오는 말이다.

루신고리의 혼복당. ⓒ최종명

루신고리의 혼복당. ⓒ최종명


루쉰고리의 딸을 위한 술, 소설 속 안주

필하풍정원(筆下風情園)에 혼복당(婚福堂)이 있다. 혼례와 술은 찰떡궁합이다. 재미난 전설이 있다. 사오싱을 대표하는 황주(黃酒)를 여아홍(女兒紅)이라 부른다. 옛날에 한 재봉사가 아들이 태어나길 기대하며 술을 담근다. 딸이 태어나자 계수나무 밑에 항아리를 묻어버린다. 딸은 자라서 재봉을 배운다. 기술이 빼어나 가업이 날로 번창한다. 딸과 수제자의 혼례 날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항아리가 생각난다. 술을 꺼내니 빛깔이 짙고 향기가 코를 찌르고 맛이 기막히게 좋았다. ‘딸을 위한 술’이라 불렀다. 소문이 나자 너도나도 딸을 낳으면 술을 담그게 됐다.

다양한 문양의 도자기에 담은 여아홍. ⓒ최종명

다양한 문양의 도자기에 담은 여아홍. ⓒ최종명

도자기에 담아 판매한다. 신랑 신부의 복을 기원하기도 한다. 삼미서옥 도랑의 오봉선도 새긴다. 삼국지의 도원결의도 보인다. 장수를 관장하는 수성(壽星), 사슴과 함께 녹성(祿星), 재물을 부르는 복성(福星)도 있다. 12간지 동물도 모두 출동이다. 루쉰도 모델이다. 거위 세 마리와 붓과 함께 왕희지도 모델로 나선다. 왕희지는 날짐승 중 호걸이며 눈처럼 희고 구슬처럼 깨끗하며 티끌 하나 없다고 말하며 거위 아(鵝)를 썼다. 나(我)와 새(鳥)를 좌우가 아닌 위아래로 나눴다. 술과 함께 역사를 마시는 기분은 상상 이상이다.

사오싱 루쉰고리의 공을기 가게. ⓒ최종명

사오싱 루쉰고리의 공을기 가게. ⓒ최종명

루쉰은 1919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공을기(孔乙己)’에서 봉건에 머물던 유교를 비판한다. 과거에 오르지 못하고 공자의 후손이라 떠벌리는 인물을 묘사한다. 중국 사회에 가하는 채찍이다. 주인공은 행색은 거지인데 읽은 책은 많다. 생계는 꾸리지 않고 잘난 체만 한다. 술을 마시기 위해 책을 훔치기도 한다. 언제나 따뜻하게 데운 황주를 마신다. 회향두(茴香豆)를 안주로 한다.

루쉰고리 공을기 가게의 회향두. ⓒ최종명

루쉰고리 공을기 가게의 회향두. ⓒ최종명

콩에 비해 굵은 잠두(蠶豆)에 약재 냄새 풍기는 회향과 계피를 넣는다. 소금으로 맛을 낸다. 황주와 궁합이 맞아 사오싱의 명물이다. 소설에서 공을기는 나(화자)에게 회(茴) 자를 쓸 줄 아는지 묻는다. ‘두(艹) 밑에 회(回)’라 대답하니 ‘옳구나’ 하며 참견이 깊어진다. ‘서법이 네 가지인데 알고 있는가?’라며 관심을 끌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는다. 도둑질하다 들켜 다리가 부러진다. 술주정뱅이라 앉은뱅이로도 한번 찾아오고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100년 전 소설 속 상황을 떠올리며 황주를 마신다. 고소한 회향두 씹으며 루쉰의 중국을 떠올린다. 그냥 가면 섭섭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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