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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00호…지적 허영과 올드함 넘어 '힙' 그 자체가 된 문지 시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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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600호…지적 허영과 올드함 넘어 '힙' 그 자체가 된 문지 시인선

입력
2024.04.04 11:00
수정
2024.04.04 11:11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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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지성 시인선 600호 기념호 출간
“젊은 세대, 시를 올드하다 보지 않아...
힙하게 보는 젊은 독자가 계속 유입”

3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문학과지성 시인선 통권 600호 기념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강동호(오른쪽부터) 문학평론가, 이광호 대표, 이근혜 주간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3일 서울 중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문학과지성 시인선 통권 600호 기념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 강동호(오른쪽부터) 문학평론가, 이광호 대표, 이근혜 주간이 참석했다. 연합뉴스

“나는 시를 좋아해”라는 선언은 어쩐지 쑥스럽다. 시를 향한 애정의 발로를 넘어 일종의 지적 과시로까지 받아들여지는 구석이 있어서다. 그럼에도 ‘나’뿐 아니라 ‘우리’는 분명히 시를 좋아한다. 3일 한국 시집 시리즈 가운데 가장 많은 호수인 600호를 돌파한 문학과지성(문지) 시인선만 봐도 이런 애정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달 창비시선 500호 발간에 이은 기록이다.

시집 시리즈가 수백 권 이어지는 전 세계적으로 드문 현상은 출판사의 의지뿐 아니라 한국의 독자, 그중에서도 젊은 독자들의 애정 없이는 어려웠을 일이라는 것이 문학계의 말이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는 이날 서울 중구에서 열린 문지 시인선 통권 600호 기념호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젊은 독자들이 끊임없이 유입되고 또 젊은 시인들이 탄생하고 있어 시인선이 600호까지 왔다”고 짚었다. “오늘날 시가 올드하거나 전통적인 장르가 아니라 새롭고 ‘힙’한 장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2000년대 이후로도 시인선 기획 활발

지난해 10월 200권 기념 한정판으로 나온 문학동네의 시인의 말 모음집(왼쪽 사진)과 올해 첫선을 보인 타이피스트의 시인선. 문학동네·타이피스트 제공

지난해 10월 200권 기념 한정판으로 나온 문학동네의 시인의 말 모음집(왼쪽 사진)과 올해 첫선을 보인 타이피스트의 시인선. 문학동네·타이피스트 제공

문지 시인선이 1970년대 첫선을 보인 이래 시인선은 끊임없이 탄생했다. 천년의시작의 시작시인선은 500호 돌파를 앞두고 있다. 민음사와 문학동네 시인선은 이달 320호와 207호가 각각 나왔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시인선도 50호를 채웠다. 올해도 박은정 시인의 1인 출판사 타이피스트가 새로운 시인선을 내놨다. 대형 문학사 출판사 위주의 시리즈 시집에 ‘새로운 시선’을 던지는 기획이다.

시대와 조응하려는 시 문학계의 움직임도 뚜렷하다. 이달로 7주년을 맞이한 창비의 스마트폰 시 애플리케이션(앱) ‘시요일’은 누적 다운로드 횟수 54만 번을 넘겼다. 이 대표는 “짧고 감각적이면서 동시대의 감각을 충족하는 언어들에 대한 젊은 세대의 관심이 한국 현대 시와 문지 시인선을 버티게 한 것 아닌가 한다”고 덧붙였다.

국경 넘어 세계로 뻗는 한국의 시

2022년 4월 김혜순 시인이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열린 14번째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2022년 4월 김혜순 시인이 서울 마포구 문학과지성사 사옥에서 열린 14번째 시집 '지구가 죽으면 달은 누굴 돌지?'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의 시는 이제 국경을 넘어 세계의 독자를 갖게 됐다. 최근 미국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받은 김혜순 시인의 시집 ‘날개 환상통’을 비롯해 해외에 번역된 문지 시인선만 86권에 달한다.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뿐 아니라 덴마크어, 태국어, 페르시아어를 모국어로 쓰는 독자도 한국 시를 읽는다. 강동호 문학평론가는 이에 대해 “여러 가지 국내 제도의 힘을 부인할 수 없다”고 말했다. “1970년대부터 이어진 각 출판사의 시인선과 시인을 발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 또 여기에 호응하는 독자”까지 일종의 선순환 구조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쯤에서 한국 시의 세계화에 한 축이 된 문지 시인선을 표지부터 다시 본다. 시인선 1호였던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1978) 이래 테두리 안의 테두리라는 특유의 디자인을 한결같이 유지해 왔다. 100권마다 테두리의 색만 교체한 전통에 따라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기념호를 시작으로 600번대의 표지는 짙은 하늘색이다. 바닷빛과 하늘빛의 조화로 “하늘로도 땅으로도 열린 개방감”(이근혜 문학과지성사 주간)을 꾀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문학과지성지 시인선 600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표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문학과지성지 시인선 600호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표지. 문학과지성사 제공

어느덧 시집의 전형이 된 표지이지만 모두가 기꺼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문지 시인선의 표지가 촌스럽다고 생각한다”(심보선 시인)는 시인들의 불만이 적지 않다. 600호를 앞두고 이를 파격적으로 바꿔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유독 젊은 편집자들의 반대가 거셌다는 후문이다. 표지를 둘러싼 소동은 문지라는 시인선, 나아가 한국 시가 지속적인 생명력을 가지는 지점을 적확히 드러낸다. 문학사적 전통을 품은 채 “전위와 정점과 깊이의 최전선을 호명하고 포용”(이원 시인)하는 시와 언젠가 마주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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