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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에 부식된 사무라이 바둑, 19년째 세계대회 ‘들러리’…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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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 물’에 부식된 사무라이 바둑, 19년째 세계대회 ‘들러리’…왜?

입력
2024.04.03 04:30
수정
2024.04.18 09: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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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메이저 대회 우승컵은 2005년 이후 ‘0’
주요 국제대회 결승은 한-중 맞대결 고착화
시대에 뒤떨어진 장고 대국 고집 ‘자충수’
승패와 무관한 한가한 수양 문화도 악영향

일본의 ‘바둑 신동’으로 알려진 나카무라 스미레(15) 3단이 지난달 4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한국 이적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수준 높은 나라에서 많이 배우고, 강해지고 싶어서 이적을 결정했다"며 한국행을 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스미레 3단은 지난 2019년 4월, 일본기원의 영재 특별전형으로 바둑계에 입문하면서 일본 바둑계 사상 최연소(10세30일) 입단 기록을 세웠다. 일본 프로바둑기사 가운데 한국 바둑계로 이적한 사례는 스미레 3단이 처음이다. 뉴시스

일본의 ‘바둑 신동’으로 알려진 나카무라 스미레(15) 3단이 지난달 4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한국 이적 이후 가진 첫 기자회견에서 "수준 높은 나라에서 많이 배우고, 강해지고 싶어서 이적을 결정했다"며 한국행을 택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스미레 3단은 지난 2019년 4월, 일본기원의 영재 특별전형으로 바둑계에 입문하면서 일본 바둑계 사상 최연소(10세30일) 입단 기록을 세웠다. 일본 프로바둑기사 가운데 한국 바둑계로 이적한 사례는 스미레 3단이 처음이다. 뉴시스

“수준 높은 나라에서 많이 배우고, 강해지고 싶었기 때문에 이적을 결정했다.”

어린 나이에 현해탄을 건너온 이유는 분명했다. 자국 보단 혹독한 실전 환경에 목말랐던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듯했다. 외다리 진검승부인 다국적 반상(盤上) 전투에 대비한 사전 포석 단계로도 읽혔다. 일본의 ‘바둑 신동’ 나카무라 스미레(15) 3단이 지난달 4일 한국 이적 이후 가진 국내 첫 공식 인터뷰를 통해 “쉽지 않았던 도전이다”며 밝힌 솔직한 속내에서다. 결국, 일본내 ‘우물 안 개구리’로 머물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실행에 옮긴 셈이다.

이날 인터뷰는 30여명의 일본 취재진까지 불러 모았을 만큼, 상당한 이목도 쏠렸다. 스미레 3단의 이적은 일본내 프로바둑기사 중에선 첫 사례였던 데다, 자국내 그의 인지도도 감안된 현장 분위기였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지난 2019년 4월 일본기원의 영재 특별전형으로 바둑계에 입문하면서 당시 일본 바둑계 사상 최연소(10세30일) 입단 기록부터 갈아치웠다. 이어 지난해 2월엔 '제26기 여류기성전'에서 타이틀을 획득, 일본 내 최연소(13세11개월) 중학생 우승자로 마크됐다. 이처럼 차세대 일본 여자 바둑의 선두주자로 주목됐던 스미레 3단이었기에 그의 한국행이 시사한 의미도 적지 않았다.

글로벌 트렌드에 역행된 대국 방식 고수…국재대회 성적 부진 초래

대국 직전 당한 교통사고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던 조치훈(오른쪽) 9단이 지난 1986년 1월 일본내 최대기전인 기성전 타이틀 결정전에서 왼손과 양 다리 모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매 대국마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좌우명으로 유명한 조 9단은 평소 “오랜 전통만 고집하면서 현대 바둑의 흐름인 속기전을 등한시 하는 일본 선수들이 국제대회 부진은 당연하다”며 체질 개선을 촉구해왔다. 한국기원 제공

대국 직전 당한 교통사고로 전치 6개월의 중상을 입었던 조치훈(오른쪽) 9단이 지난 1986년 1월 일본내 최대기전인 기성전 타이틀 결정전에서 왼손과 양 다리 모두 깁스를 하고 휠체어에 앉은 상태로 고바야시 고이치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매 대국마다 ‘목숨을 걸고 둔다’는 좌우명으로 유명한 조 9단은 평소 “오랜 전통만 고집하면서 현대 바둑의 흐름인 속기전을 등한시 하는 일본 선수들이 국제대회 부진은 당연하다”며 체질 개선을 촉구해왔다. 한국기원 제공

이 가운데 눈 여겨볼 대목은 스미레 3단의 이적 이면에 자리한 일본 바둑계 현실이다. 한 때는 세계 바둑계의 중심에 섰던 일본 입장에선 아쉽겠지만 초라해진 자국내 바둑계 현주소 역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어서다.

무엇보다 일본 바둑계가 세계적인 추세와 동떨어진 과거 대국 방식에 매몰되면서 ‘고인 물’로 전락했단 시각부터 팽배했다. 이에 대해 스미레 3단의 지도 사범이었던 한종진(45·현 한국프로기사협회장) 9단은 “현대 바둑은 장고 보단 속기가 대세인데, 일본내에선 여전히 장고 대국 선호도가 있다”며 “바둑을 치열한 스포츠로 규정한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일본에선 승패와는 무관한 ‘예(藝)’나 ‘도(道)’의 수련 분야로 인식하고 있다”고 짚었다. 현재도 일본 내에서 1박2일 대국(각자 8시간 제한)이 흔한 까닭이다. 각자 2~3시간 제한 중심의 세계대회와는 큰 차이다. 지난 2005년 ‘LG배 기왕전’에서 장쉬(44) 9단의 타이틀 획득 이후,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 일본의 우승이 전무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치 않다. 일본 바둑계의 살아있는 전설인 조치훈(68) 9단조차 평소 “오랜 전통만 고집하면서 현대 바둑의 흐름인 속기전엔 약한 일본의 국제대회 부진은 당연하다”고 지적해왔다. 지난해 말, 일본 프로바둑계에선 처음으로 통산 1,600승에 도달한 조 9단은 첫 7대 주요 기전 전관왕과 함께 통산 16회 우승 기록 등을 보유하고 있다.

프로지망생 급감하면서 세대교체 지지부진…미래도 불투명

지난 2005년 4월,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제9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일본의 장쉬(왼쪽) 9단이 중국의 위빈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장쉬 9단은 5번기(5전3선승제)로 진행됐던 이 대회에서 3승1패로 생애 첫 처음으로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장쉬 9단의 이 대회 우승은 현재까지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 차지한 일본의 마지막 타이틀 획득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한국기원 제공

지난 2005년 4월, 서울 홍익동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렸던 ‘제9회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서 일본의 장쉬(왼쪽) 9단이 중국의 위빈 9단과 대국을 벌이고 있다. 장쉬 9단은 5번기(5전3선승제)로 진행됐던 이 대회에서 3승1패로 생애 첫 처음으로 세계 메이저 기전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장쉬 9단의 이 대회 우승은 현재까지 세계 메이저 기전에서 차지한 일본의 마지막 타이틀 획득 기록으로 남겨져 있다. 한국기원 제공

일본 바둑 국가대표팀의 느슨한 운영 또한 기대 이하의 국제대회 성적을 가져온 이유로 지목되고 있다. 경쟁 상대인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 실전적인 연습 대국 등으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일본에선 선수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관련 최근 일본기원 실무진들은 한국기원을 비공개 방문, 뒤늦게 우리나라 바둑 국가대표팀 운영과 관련한 조언까지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지부진한 세대교체는 더 큰 문제다. 일본 바둑계에 정통한 한국기원 관계자는 “국제대회 성적 부진은 일본내 바둑 인기 하락과 프로지망생 감소까지 불러오고 있다”고 귀띔했다. 지난 2월, 한·중·일 바둑 삼국지로 열렸던 ‘제25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일본의 마지막 주자로 출전한 이야마 유타(35) 9단은 한국의 신진서(24) 9단에게 완패, 41전41패의 수모만 이어가면서 이런 기류를 상기시켰다. 이야마 유타 9단은 6년 전만 해도 자국내 주요 7대 기전을 독식했던 일본 바둑계의 간판스타다.

바둑계 안팎에선 일본 바둑의 경쟁력 회복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또 다른 한국기원 관계자는 “현재 일본 주최의 세계 메이저 대회가 ‘제로(0)’인 배경엔 부족한 자국 선수들의 실력 문제도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라며 “20년 가까이 굳어졌던 일본 바둑의 체질 개선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내다봤다.

허재경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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