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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계획했지만 ‘내 삶’도 포기 못 해…사실은 아이 원치 않는 걸까요

입력
2024.03.11 04:30
수정
2024.03.11 18:58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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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저는 임신을 준비하는 30대 기혼 여성입니다. 지금의 남편을 만나면서 ‘이 사람이라면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에 결혼했고,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원하고, 저 역시 남편과 저를 닮은 아이를 갖고 싶고, 남편이라면 좋은 아빠가 되어줄 거란 믿음에 출산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정말 엄마가 될 준비가 된 건지 의심이 됩니다. 벌써 가임기 기준으로 젊은 나이가 아닌데도, 출산을 미룰 수 있다면 최대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커집니다.

사실 저는 어려서부터 비혼주의자였습니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에게 문제가 많았기 때문에 결혼과 출산은 여성에게 인생을 돌이킬 수 없는 족쇄라고 생각했습니다. 돈벌이와 가사를 전담하는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기본적인 경제생활도 거의 하지 않은 채 늘 도박, 바람, 폭력을 일삼았습니다. 아버지는 또 어린 자식들 앞에서도 어머니를 때리거나 목을 조르는 등의 심한 폭력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매일 맞고 홀로 뼈 빠지게 일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한 건 자식을 낳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도 저를 포함한 자녀들에게 "너희 때문에 산다"는 말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불쌍하고, 자식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딸인 저를 보호하기보다는 오히려 지켜줘야 하는, 조금 어리석은 사람으로도 느껴졌습니다.

그러다 남편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지난해 회사를 옮기는 과정에서 퇴사하자마자 덜컥 임신이 됐습니다. 임신 기간에는 일을 쉬기로 했지만, 태아 상태가 좋지 않아 초기에 유산을 하게 됐고 다시 새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아이를 원하기는 했지만, 계획했던 시점이 아닌 시기에 임신과 유산을 경험하자 '엄마가 되어 인생이 바뀌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봐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습니다.

유산 이후로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동호회에 나가는 등 취미 생활도 적극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20대인 다른 회원과 어울리는 모습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이전에는 관심 없었던 패션이나 미용에도 돈을 많이 씁니다. 이런 행동에 남편과 갈등도 생겼지만, 어차피 아이가 생기면 하지 못할 일이니, 그때까지만 봐 달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서운해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습니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했지만, 최근엔 이런 제가 엄마가 될 자격이 있을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임신을 회피하고, 나이까지 부정할 정도라면 아이를 원하지 않는 건 아닐까요. 그러면서도 아이를 낳으려는 자신이, 자격이 없으면서도 자식을 낳아서 피해를 준 아빠와 닮은 것 같아서 괴롭습니다. 어렸을 때는 아빠와 닮은 남자를 만날 것 같아서 비혼주의를 꿈꿨는데, 결혼하니 제가 아빠 같은 사람이 돼서 남편과 가족에게 피해를 줄 것 같습니다.

평행우주가 존재해서 두 명의 제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한 명은 현재의 남편을 만나 귀여운 아이를 낳고 성실하게 일과 가정을 일구는 평범한 아줌마로 살아가고, 다른 한 명은 일하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자유로운 여자로 살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김재희(가명·35·직장인)

사연을 살펴보면서 재희씨는 섬세한 성격을 지닌 분 같다고 느꼈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느낄 수 있는 만큼, 타인에 대한 이입이 쉽기에 어려서부터 다른 자녀들에 비해 어머니에게 유독 감정이입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는 부정적인 인식이 당신 안에 크게 자리 잡은 까닭도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한 탓입니다.

부모도 부모이기 이전에 하나의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자기 정체성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부모 역할만 더해지는 겁니다. 하지만 재희씨는 어머니를 보면서 어머니라는 역할에 매여 정체성이나 독립적인 영역이 없는 것처럼 느꼈고, 또 반대로 아버지는 지나치게 자유와 독립만 추구하면서 본인 위주로 사는 극단적인 모습을 봤습니다.

사실 독립과 의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그 자체로 인생의 과업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죠. 가정에서 독립할 것인가 아니면 의지할 것인가는 한쪽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여기는 데부터 문제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재희씨는 성장 과정에서 겪은 부모의 극단적인 모습으로 이런 균형을 맞추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면서 피하려고 하는 듯합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부부 폭력에 노출된 경험은 강렬한 감정 기억으로 남아 현재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쉽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만약 정말로 독립적인 인생을 원했다면 결혼하지 않았겠지만, 당신은 의지할 만한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상태입니다. 결혼 이후로 임신을 준비하게 되자 자신만의 영역이 없어지리라는 우려에 취미 생활에 몰입하고 있죠. 개인의 취미가 무엇이든지 관계는 없지만, 인간관계에 영향을 미친다면 그때부터는 과한 집착의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봅니다. 재희씨 역시 머리로는 지나치다고 인식하지만, 동호회 활동을 계속해 나가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연상되는 압박과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일 수 있습니다.

임신에 대한 재희씨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가진 부정적인 인식, 부모와 관련된 여러 복잡한 감정들을 잘 이해해서 해소하는 일이 먼저입니다. 어머니라는 역할이 족쇄처럼 인식되는 까닭은 역할 자체가 아닌 재희씨가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가졌던 부정적인 감정이 족쇄가 됐기 때문입니다. 우선 구체적으로 부모님에게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보내주신 사연에서는 '부모님은 이런 사람'이라는 묘사는 등장하지만, 당신의 감정은 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또 계획하지 않은 시점의 임신과 유산에 대해서도 놀람이나 혼란 등 여러 생각이 들기 마련인데도 재희씨는 여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죠. 우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구체적으로 적어 보고 인식하기를 권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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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희씨는 어머니같이 되는 것이 두렵다가도 이런 행동이 결국 아버지 같은 행동일 수 있다는 서로 다른 측면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의존과 독립 사이의 갈등이나 다름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 개념은 얼마든지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통합이 어려웠던 건 부모와 애착 관계가 안정적으로 형성되기 힘들었던 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어릴 적 부모를 충분히 의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책임감 없는 아버지는 물론이거니와 무력한 어머니를 오히려 지켜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 보지 않았다면 대상을 두고 전적으로 나쁘거나 좋은 면만 보기 쉽습니다. 평행 우주에서 한쪽은 가정적 또 한쪽은 독립적이라는 '극과 극'으로 나눠서 살고 싶다는 재희씨의 바람도 욕심이 많아서가 아니라 통합이라는 개념이 희박하다는 방증입니다. 부모에게서는 안정적인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 만큼 지금 남편이나 친구들과 이런 관계를 맺어 보면 어떨까요. 애착 관계는 어릴 때뿐 아니라 성인이 된 후에도 만들어갈 수 있는데, 부부 관계는 매우 중요한 기회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감정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타인과의 경계를 지키는 방식으로 안정적인 관계를 맺는 연습을 하는 겁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어린 시절 가정으로부터의 경험으로 인해 두 영역의 균형을 맞춰 가야 한다는 인식이 옅은 재희씨지만, 어머니라고 해서 자기의 삶이 없던 것이 결코 아닐 겁니다. 시기에 따라 한쪽으로 치우치는 때도 있겠지만, 얼마든지 본인이 균형을 맞출 수 있습니다. 재희씨는 무언가를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강하지 않아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큰 불안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임신과 출산에서도 아이에게 완전히 통제되거나 엄마 역할이라는 족쇄로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되리라고 여깁니다. 이런 사고 역시 성장 과정에서 경험한 감정으로 인한 연상입니다. 자신이 통합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관점을 회복해야 합니다.

당신이 가진 섬세한 기질이 부모라는 환경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도록 했지만, 반대로 이런 성격은 본인의 감정을 되돌아보고 인식하는 데는 유리할 수 있습니다. 또 재희씨에게는 현재 남편이라는 의지와 독립이 동시에 가능한, 안정적인 관계를 맺어볼 자원도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부모로부터 주어진 감정이 아닌 오롯이 당신만의 판단으로 미래를 그릴 당신을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 가기


정리=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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