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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줄의 두께

입력
2024.03.09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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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무장된 사랑이 혐오를 이긴다...'LOVE WINS'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김신현경 서울여대 교양대학 교수와 서한영교 작가가 번갈아 글을 씁니다.



사랑은 언제나 지켜내야 하는
사랑할 권리.

티아고 데 멜로, '무장된 사랑' 중에서


키테이 데이비슨의 생전 모습. X 캡쳐

키테이 데이비슨의 생전 모습. X 캡쳐

2014년 12월 2일, 흑인-장애인-트랜스젠더-남성청년, 키테이 데이비슨(Ki'tay Davidson)이 느닷없이 세상을 떠났다. 경찰은 사망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시행한 후 사망진단서를 작성했다. 사망진단서 성별 칸에 해부학적 생식기관에 따라 여성으로 기입되었다. 인종-장애-트랜스-젠더 교차해방운동에 앞장서며 침해받을 수 없는 자기결정권에 따라 ‘오롯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했던 키테이의 삶에 대한 불명예이자 모욕으로 여긴 그의 반려자와 동료들은 이를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사망진단서일 뿐이잖아요”라고 반복하는 행정 권력에 맞서 싸웠다. 법률대응팀을 꾸리고, 동료와 단체들을 조직해 오롯이 존재할 권리, 오롯이 슬퍼할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싸웠다. 성적 자기결정권에 따른 성별로 세계에 ‘한 줄’ 기입되고자 했던 트랜스 해방투쟁은 마침내 사망진단서 속 ‘한 줄’을 바꾸어냈다. 투쟁을 이끈 반려자 테일릴라는 장례식 추도사의 마지막 문장으로 이 ‘한 줄’을 내려놓았다. "LOVE WIN."

짐 오버거펠이 2015년 6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정 이후 텍사스주 의사당 앞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단에는 '#LOVE WINS'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짐 오버거펠이 2015년 6월 29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의 동성결혼 합헌 판정 이후 텍사스주 의사당 앞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하고 있다. 연단에는 '#LOVE WINS'라는 팻말이 붙어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2015년 6월 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이 동성결혼이 합헌이라는 역사적 결정을 내렸다. 이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환호했다. 짐 오버거펠이었다. 그는 21년간 함께한 동성 배우자가 숨진 뒤 사망신고서에 미혼이 아니라 자신을 배우자로 기입하기 위해 싸우던 이였다. ‘한 줄’을 바꾸기 위해 시작한 투쟁이 미 전역을 무지갯빛으로 뒤덮었다. “혼인 평등은 대단한 진전이고 축하할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완전한 평등을 위한 투쟁에 계속 전념하겠습니다”라고 결의를 다지는 오버거펠이 서 있는 연단을 지켜선 ‘한 줄’의 문장. “LOVE WINS.”

#LOVE WINS

“LOVE WINS”, 이 ‘한 줄’이 올해 초 뜻밖에도 한국에서 주목받았다. 대중가수 아이유의 발매 예정인 노래 제목으로 사용된 것이다. 성소수자들의 사랑과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대표적인 구호로 사용되는 “LOVE WINS”를 이성애를 다루는 곡 제목으로 사용한 것에 온라인 공간이 먼저 화들짝 놀랐다. “빼앗길 수 없는 퀴어한 사랑의 역사가 쌓여있는 낱말이다!”와 “겨우 낱말 하나 가지고 왜 이리 난리냐!”로 나뉘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너무 과한 거 아냐?’ 하고 대꾸했을지 모르겠다. 사랑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젠더퀴어 동료들이 없었다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성소수자 차별과 혐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더라면… ‘고작 노래일 뿐이잖아’ 하고 응수했을지 모르겠다.

"날 데려다줄래?"

하지만 “LOVE WINS”라는 ‘한 줄’ 안에는, 내가 우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줄줄이 거주하고 있다. 가족에게 커밍아웃했던 날 머리채 잡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했다던 L, 반려자와 손잡고 신호등에 서 있는데 뒤에서 “호모 새끼들” 하고 혐오테러를 당했다던 O, 반려자와 손을 잡고 걷고 싶어도 따가운 눈총이 두려워 따로 걸었다는 V, 언제나 운 좋게 살아남은 것일 뿐이고 더럽게 죽는다 해도 하나 이상할 것 없으니 슬퍼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을 달고 사는 E. 한국에선 못 살겠다고 캐나다로 가 동성 동반자와 혼인한 W, 몇십 년째 남자야? 여자야?라는 말을 들으며 산다는 I, 들키지 않기 위해 웃는 소리마저 신경 쓰며 살고 있는 N까지.

또 “LOVE WINS”라는 ‘한 줄’ 안에는, 그저 사랑한다는 것만으로 받게 되는 낙인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동성애를 반드시 죽여야 할 ‘범죄’로 간주했던 중세 말경의 처형장. 동성에 대한 성적 욕망을 ‘정신이상’으로 여기며 '잘못된 성정체성'을 고치려 강제수용하던 근대의 병원. 퇴행적 ‘성적 변태’로 명명되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민’으로 규정되어 입국을 거부당해야 했던 19세기 말, 미국의 입국 심사장. 성소수자를 ‘타락한 자’로 낙인찍은 나치에 의해 분홍색 역삼각형 표찰을 달고 살해, 강제 거세, 생체실험에 동원됐던 홀로코스트. 트랜스 ‘가짜 여성’과는 학교에 같이 다닐 수 없다며 대학 입학 취소를 요구하던 어느 여자대학교까지.

LOVE WINS, 수백 년간 지속된 혐오의 낙인들 속에서도 써 내려간 ‘한 줄’. LOVE WINS, 죽음과 공포, 울음과 차별, 신음과 혐오를 뚫어내고 치켜든 ‘한 줄’. LOVE WINS, 혐오의 세계를 돌파하기 위해 사랑으로 무장한 ‘한 줄’. 사랑이 이긴다,는 믿기 어려운 이 ‘한 줄’ 속에 끝끝내 믿고자 하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

“나쁜 결말일까?”

'러브 윈즈(love wins)'에 '올(all)'을 추가한 아이유의 신곡 홍보 포스터. 이담엔터테인먼트 제공

'러브 윈즈(love wins)'에 '올(all)'을 추가한 아이유의 신곡 홍보 포스터. 이담엔터테인먼트 제공

대중가수 아이유는 노래에 관한 논란이 증폭되자 직접 신곡의 작업 배경을 밝히며 “대혐오의 시대”에 “사랑하기를 방해하는 세상에서 끝까지 사랑하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4일간의 논란 끝에 결국 소속사는 “이 곡의 제목으로 인해 중요한 메시지가 흐려질 것을 우려하는 의견을 수용”하여 낱말 하나를 추가해 “LOVE WINS ALL”로 제목을 수정하였다. 퀴어한 사랑이 이 논란을 증폭시켜 노래 제목 ‘한 줄’을 바꾸어낸 것이다. “대혐오의 시대”에 포위된 퀴어한 사랑이 지켜낸 ‘한 줄’의 문장. 그 ‘한 줄’의 문장이 2024년 2월 21일 노회찬상 특별상을 시상하던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

“꼭 같이 가줄래?”

“사랑이 이긴다! 작년 승소했을 때 저희가 외친 말인데요. 우리는 혐오와 차별, 배제와 거부, 낙인과 편견을 우리의 사랑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수상자는 동성부부의 법적 지위를 공적으로 인정한 최초의 판결을 쟁취해낸 지 꼭 1주년을 맞은 김용민·소성욱 부부였다.

동성부부 소성욱(왼쪽)씨와 김용민씨가 지난해 2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항소심에서 승소 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동성부부 소성욱(왼쪽)씨와 김용민씨가 지난해 2월 2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 인정 항소심에서 승소 후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뉴시스

2021년부터 시작된 ‘동성 배우자 건강보험 피부양자 소송’ 원심에서는 “혼인은 여전히 남녀의 결합을 근본 요소”로 한다며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을 박탈했다. 이에 불복해 제기한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취소하고 “실질적으로 혼인 생활을 하고 있는 동성 커플은 사실혼 관계로 인정되는 이성 커플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봤다. 동성부부의 피부양자 자격박탈은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어 위법”하고 차별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고 밝혔다. 건강보험증에 남편을 ‘동거인’이 아니라 ‘배우자’로 한 줄 기입하기 위한 투쟁이 이끌어낸 판결이었다.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판결문 뒤에 사회적 쟁점에 대한 의견을 덧붙였다. “누구나 어떠한 면에서는 소수자일 수 있다. 소수자에 속한다는 것은 다수자와 다르다는 것일 뿐, 그 자체로 틀리거나 잘못된 것일 수 없다. 다수결의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인식과 이를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이는 인권 최후의 보루인 법원의 가장 큰 책무이기도 하다”라고 밝혔다. 성소수자 평등권을 향한 사랑의 투쟁이 이끌어낸 눈부신 결과였다. 사랑이 이긴다,라는 ‘한 줄’의 문장이 두꺼워졌다.

“이토록 우리는 함께일까?”

혐오와 차별로 얼룩진 세상 속에서 '한 줄' 바꾸어내고, '한 줄' 기입하며, '한 줄' 지켜내기 위해 무장할 수밖에 없는 사랑, 그러니 사랑은 ‘무장된 사랑(armed love)’으로 대혐오의 세계를 돌파해 나갔다. 세계와 마주하고, 세계와 경합하고, 세계에 책임을 물으며 이 사랑은 이길 수 없다고 자꾸 주저앉히는 세계에 맞서 무장된다. 무장된 사랑은 평등한 권리를 향한 끝나지 않을 싸움을 예고하는 것, 사랑할 만한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 오롯한 자신으로 살아갈 만한 세계를 구성해나가는 것, 그리고 세계를 열렬히 사랑하는 방식으로서 투쟁하는 사랑의 이름이라는 걸 배웠다. 그 무장된 사랑을 통해 나를, 우리를, 세계를 사랑하는 방법을 새롭게 배우고자 한다. 희망이 잘 보이지 않는 엉망진창의 세계 속에서도 낙담하지 않고, 도망치지 않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무장된 사랑'의 문장을 배우고자 한다.

욕하고, 저주하고, 비난하는 마음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 존중하는 마음, 사랑하는 마음을 이길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습니다. 차별과 혐오에 저항하는 모든 사랑은 반드시 이깁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사랑과 투쟁은 결국에는 이길 수밖에 없습니다. 끝끝내 지치지 않아 결국 지지 않는 사랑을 쟁취할 것입니다. 사랑이 이겼고, 사랑이 이겨왔고, 사랑이 이기고 있고, 사랑이 이길 것입니다.

키테이 + 오버거펠 + 김용민·소성욱의 문장

외우자. 몸 안으로 문장이 흐를 때까지.

우리에게는 사랑의 노래를 멈추어야 할 이유가 없다.

티아고 데 멜로, '무장된 사랑' 중에서

서한영교 작가는

시인이자 페미니스트, 노들 장애인야학 교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8년 격월간 '동시마중'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붕어빵과 개구멍' '두 번째 페미니스트'가 있다. 함께 쓴 책으로는 '페미니스트가 된 남자들'이 있다. 시각장애를 가진 반려자와 함께 아이를 돌보고 있다. 장애, 퀴어, 빈곤, 생태, 비인간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사랑, 우정, 연대를 지향 삼아 젠더와 돌봄에 관한 글을 쓴다.

서한영교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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