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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쿠팡 중독자의 변심

입력
2024.02.19 04:30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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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서울 시내의 한 주차장에 주차된 쿠팡 배송 차량. 연합뉴스

15일 서울 시내의 한 주차장에 주차된 쿠팡 배송 차량. 연합뉴스


고백하자면, 나는 쿠팡 중독자였다. 굳이 ‘였다’라고 쓴 이유는 블랙리스트 보도 후엔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쿠팡 사람에게 들은 얘기다. 쿠팡 헤비유저 감별법은 ‘멤버십으로 절약한 금액’이 얼마인지 보면 된다는 것. 그 기준에 따르면 나는 최근 3개월 32건을 주문해 무료배송과 할인으로 26만6,940원을 아꼈다. 작년 주문 총 211건. 가족이 쓰는 휴대폰 네 대가 다 쿠팡 자급제로 산 것들이다.

쿠팡을 아꼈던 이유는 빨라서였지만, 기존 업계에 없던 ‘혁신’과 ‘역동’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 단위 적자에도 흔들림 없이 돈을 쏟은 패기는 때론 무모해 보였다. 크지 않은 한국 시장에 외국자본이 왜 목숨을 거나, 기이하기도 했다.

결국 쿠팡은 이겼다. 3대 마트와 소수 인터넷쇼핑몰이 구축하던 철옹성을 뚫고 마침내 업계 1위 이마트 매출을 넘었다. 다섯 분기 연속 흑자로, 의심받던 지속성마저 증명했다. 코로나19 때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사회안전망 역할을 했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러나 블랙리스트를 본 나는 쿠팡 3% 적립카드를 가위로 자를까 고민 중이다. 남들이 다 질 거라던 싸움을 승리로 이끈 자신감은 독선이 됐고, 경쟁사에만 보였어야 할 패기는 이제 노동자와 공동체를 몰아세운다. 근로자·언론인·국회의원의 이름에 ‘채용불가’ 딱지를 붙였는데, 재발방지 약속이나 사과 대신 "너 고소"라는 거친 방식으로 대응한 건 더 실망스러웠다.

본보 기자들도 블랙리스트에 있었다. 두 기자는 쿠팡 기사를 쓰지도 않았는데 명단에 올라갔고, 한 기자는 과거 ‘편리한 새벽배송 이면엔 노동자들의 노고가 숨어 있다’는 기사를 쓴 지 며칠 만에 이름을 올렸다. 특정 회사가 회사 밖 사람에게 선제적인 주홍글씨를 새긴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처사다. 이렇게 회사와 무관한 민간인 이름까지 올렸다는 점은 블랙리스트가 꽤나 자의적으로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점을 방증하는 정황이다.

쿠팡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회사 고유권한인 인사평가라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모든 블랙리스트엔 저마다 명분은 있었다. 악명 높았던 할리우드 블랙리스트(냉전 직후 미국 영화계 반공주의 광풍)도 전체주의 소련의 확장에 대한 불안감에서 시작됐다. 박근혜 정부 문화계 블랙리스트도 ‘좌파’들이 문화·예술을 장악하고 있다는 청와대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와 같은 배제와 낙인의 방식은 절대 좋은 결과로 끝나지 않았고, 세상에 긍정적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물론 분기 매출 8조 원이 넘은 쿠팡 입장에서 ‘이영창 고객’ 한 명 잃는 건 영업에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는다. 로켓배송 금단증상을 떨치기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겐 생각보다 고상한 면이 있다. 이익만 보며 행동하진 않고, 신념이나 가치를 위해 불편도 감수한다. 공정무역 제품을 굳이 쓰고, 때론 봄꽃 피는 거리를 감상하려 빠른 지하철 대신 느린 버스를 타기도 한다. 부당하다 생각되는 일들이 반복된다면, 고객이 로켓배송 하나만 보고 다른 걸 눈감아 주지 않는 상황도 올 수 있다.

뒤집어 보면 이번 사태는 쿠팡에겐 전환점일 수 있다. 모든 장애물을 하나씩 깨부수며 돌파했던 방식을 이어갈지 고민할 시점 말이다. 작년에 504만 원의 매출을 올려줬던 고객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건의사항이다.

이영창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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