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신비주의·하드코어 음악 'K팝 공식' 깨져
SM·하이브, 라이즈·투어스 등 남자 아이돌 그룹으로 전략 변화
"대중성 약화·숏폼 소비 영향" 음원 톱10 이례적 진입
#. 노래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너를 기다려'에서 "비비디 바비디"라고 주문을 외운 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하이브 소속)는 음악과 뮤직비디오 등에 판타지 코드를 곳곳에 심어놔 '마법 아이돌'로 불렸다.
#. 고정 멤버 없이 여러 프로젝트 그룹으로 증식하는 NCT(SM엔터테인먼트 소속)를 보며 K팝 팬들은 특정 멤버가 어떤 팀으로 활동하게 될지 알 수 없었다.
#. 그룹 스트레이키즈(JYP엔터테인먼트 소속)는 거칠고 공격적인 음악에 빈틈없는 군무를 바탕으로 한 '극강 K팝'으로 세계 음악 시장을 공략했다.
①복잡다단한 세계관 ②신비주의 ③폭발하는 사운드의 하드코어 음악은 지난 10여 년 동안 'K팝 공장'을 돌린 핵심 연료였다. 각기 다른 초능력을 지닌 멤버들이 우주에서 지구로 내려왔다는 설정으로 데뷔한 엑소(2012)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K팝 기획사는 세 가지 코드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남자 아이돌 그룹을 기획했다.
세계관·신비주의·하드코어 음악 없는 '3無 K팝'
2, 3년 전까지 대세였던 이 같은 'K팝 공식'이 깨지고 있다. ①어렵고 뜬구름 잡는 세계관을 버리고 ②신비주의 대신 친근함으로 중무장해 ③퍼포먼스를 부각하기 위한 음악이 아닌 듣기 편한 노래를 앞세운 남자 아이돌 그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데뷔한 지 1년이 채 안 된 5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 라이즈(SM), 투어스, 보이넥스트도어(하이브) 등이 모험의 주인공들이다.
이런 변화는 남자 아이돌 그룹과 대중의 접점을 넓히려는 전략 변화로 풀이된다. 팬덤 강화 수단으로 썼던 세계관, 신비주의, 하드코어 음악으로 시장 확장의 벽에 부딪혀 위기감을 느낀 K팝 기획사들이 정반대의 방식으로 활로를 찾고 나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무거운 세계관이 사라지자 음악은 한결 가벼워졌다. 5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들은 정겨운 복고풍 디스코(라이즈 '겟 어 기타')나 신스팝(투어스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등 묵직한 비트보다 멜로디가 강조되는 음악에 주력했다. "이름이 뭐야? 너와 내 거리는 세 걸음 남았어"('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처럼 노랫말도 친근해졌다. 이상민 SM 총괄 디렉터는 "라이즈는 정해진 형태에 맞추기보다 변화하고 진화하는 리얼타임 오디세이(실시간 서사시)를 채택했다"고 기획 의도를 밝혔다. '탈이수만 체제'에서 이뤄진 변화다. 보이넥스트도어 멤버 운학은 "곡 작업을 할 때도 멤버들이 일상에서 실제로 쓰는 말투와 화법을 넣으려고 했다"고 말했다.
변화의 또 다른 핵심은 '일상 바이브(느낌)'의 극대화다. SM은 지난해 7월 라이즈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첫 게시물로 일곱 멤버들이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후줄근한 트레이닝복을 입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면서 찍은 셀카 사진을 올렸다. 일상적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하이브는 아예 신인 그룹 이름을 '옆집 소년'(보이넥스트도어)으로 지었다. 투어스는 번쩍이거나 화려한 무대 의상이 아닌 교복 차림으로 무대를 누빈다.
"괜찮겠어?" 걱정 속 SM·하이브의 각성
5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을 제작한 K팝 기획사 관계자는 "'일상'이 콘셉트라 분장도 진하게 안 하고 무대 의상도 평상복처럼 입다 보니 데뷔 무대 때 다른 기획사 관계자들이 '괜찮겠어?'라고 걱정하더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SM과 하이브 등이 남자 아이돌 그룹 제작 방식에 변화를 준 건 남자 아이돌 그룹 음악이 음원 시장에서 외면당하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멜론 등 국내 7개 음원 플랫폼의 음악 사용량을 집계하는 가온차트에 따르면 지난해 인기곡 톱15 안에 남자 아이돌 그룹 노래는 단 한 곡도 들지 못했다. 김도헌 음악평론가는 "이해하기 어려운 세계관 속에 오랫동안 남자 아이돌 그룹 음악이 만들어지면서 피로도가 쌓이고 대중과도 멀어졌다"며 "K팝 제작 방식의 변화는 K팝 공식의 대중적 거부에 대한 반작용"이라고 현상을 바라봤다. 그는 또 "그간 K팝 기획사들이 미래 서사에 얽매여 남자 아이돌 그룹의 음악을 만들었다면 최근엔 현재나 과거에 집중하는 게 새로운 변화"라고 짚었다.
K팝의 오랜 제작 공식이 힘을 잃고 있는 건 짧은 영상을 올리는 틱톡 등을 통해 배경음악(BGM)처럼 가볍게 들을 수 있는 음악들이 10~30대에 사랑받는 데 따른 변화라는 시각도 있다. 김상화 대중음악평론가는 "'생활 속 BGM'이 음원 시장 화두로 떠오르면서 K팝 기획사들이 5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을 통해 적극적으로 이지 리스닝 전략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음원시장 약진 이변
세계관·신비주의·하드코어 음악 없는 'K팝 3무 전략'으로 대중의 진입 장벽을 낮춘 5세대 남자 아이돌 그룹 노래는 음원 시장에서 약진하고 있다. 밴드 이지의 히트곡 '응급실'(2005)을 샘플링해 향수를 자극한 라이즈의 '러브 119'는 이달 둘째 주(5일~11일) 멜론 주간 차트 4위까지 치고 올라갔고, 지난달 공개된 투어스의 '첫 만남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는 11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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