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 하청의 눈물]
1년 6개월째 공사비 못 받은 하청업체
정부에 신고했지만 하세월
"소송 이겨도 그쯤엔 파산해 있을 것"
피해자지만 구제받을 길 없는 현실
경기 시흥시의 A토목회사 대표 임모씨는 최근 사채 3억 원을 빌렸다. 원청사 B건설사로부터 1년 6개월 넘게 공사대금 17억 원을 받지 못해 협력사 대금은 물론 직원 월급도 밀릴 만큼 회사 자금이 바닥났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A사는 최근 B사로부터 10억 원대 손해배상청구 소송까지 당했다.
한국일보가 전문가 조언을 바탕으로 해당 사건을 취재해 보니 부당 특약에 따른 불공정 거래로 볼 지점이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임씨는 "구제받을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업계에선 불공정 하도급 거래 근절을 위한 정부 노력에도 A사 같은 사례가 많다고 지적한다.
"1년 6개월째 17억 못 받았어요"
사연엔 하청업체 A사, 원청회사 B사, 발주처인 시행사 C사가 등장한다. 2021년 12월 B사는 C사가 추진한 경기 시흥시 오피스텔 건축사업을 300여억 원에 수주했다. B사가 프로젝트 파이낸싱(PF) 대출 때 책임준공 보증을 서겠다는 조건이었다. 책임준공은 시행사의 부도, 민원 등을 이유로 시공사가 공사를 중단할 수 없고 예정된 공사기간 내에 준공해야 하는 의무를 일컫는다. 공사 관련 모든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충남에 본사를 둔 B사는 지역에서 손꼽히는 매출 1,500억 원 수준의 중견 건설사다.
2007년 문을 연 토목업체 A사는 이 사업의 기초공사 격인 지하층 건축을 위한 토목 공사 하청업체로 선정됐다. A사가 받기로 한 공사금은 65억 원이다. 3사는 2021년 12월 21일 본계약에 앞서 확약서를 체결한다. ①하청업체 A사는 B사와 토목 공사를 49억 원에 계약하고 ②토목 공사 설계 변경으로 발생한 추가 공사 대금은 시행사 C사와 별도 계약하되 이 비용을 B사에 일절 청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추후 문제가 되는 이 확약서는 왜 만들어진 걸까. C사 전직 임원의 설명이다. "B사가 PF 약정 전에 공사비를 전부 못 내겠다고 했어요. 사업이 어그러지는 걸 막으려고 B사 요구대로 공사비 49억 원은 B사가 대고 나머지 16억 원은 시행사가 내기로 했어요. 확약서는 B사가 요구해 썼습니다."
원래 A사가 낸 공사 견적이 73억 원이었지만 공사비를 낮추기 위해 조금 더 저렴한 방식으로 설계를 변경했다. 따라서 확약서 ②에 명시된 추가 공사대금은 시행사 몫인 16억 원을 의미한다는 게 이 관계자의 설명이다. 임씨 설명도 같았다. 임씨는 이듬해 3월 B사와 49억 원, C사와는 16억 원짜리 하도급 계약서를 체결했다.
원청사의 엉뚱한 요구
2022년 6월 A사는 한창 토목 공사를 하던 중 본래 설계와 다른 부분을 연이어 발견했다. 설계대로면 땅을 파서 지하층 구조만 만들면 됐지만, 땅을 파다 보니 기존 건축물 하중을 지탱하기 위한 말뚝이 곳곳에 박혀 있는 건 물론이고 암석(바윗돌)도 나왔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비싼 장비를 투입하는 등 애초 설계와 별개로 발생한 추가 공사비가 17억 원에 달했다. 본보가 A사와 B사 사이에 오간 공문을 확인하니, A사는 매번 실정 보고를 통해 이를 B사에 보고했다. 몇몇 작업은 B사가 직접 지시하기도 했다. 임씨는 "공사비를 줄 거라 생각하고 계속 진행했다가 투입 비용이 급증했다"고 했다.
A사는 2022년 8월 추가 공사비 17억 원을 청구했지만 B사는 주지 않았다. 이를 두고 갈등이 커지자 그해 11월 2일 A, B, C사 대표 및 임원 회의가 열렸다. 당시 회의 자료를 보면 B사 대표가 추가 공사비 17억 원에 대해 "일주일 뒤까지 검토해 연락드리겠다"는 대목이 나온다. A사는 공사비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고 이듬해 4월 7개월에 걸쳐 추가 공사를 모두 마무리한다.
공사비를 못 받은 A사가 공정거래위원회 제소를 거론하자 B사는 2023년 7월 문제의 확약서를 들이민다. B사와는 49억 원 공사 계약만 했으니 설계 변경에 따른 추가 공사대금은 C사에 요구하라는 것이다.
임씨는 "B사가 모든 걸 책임지는 책임준공 현장인데 관련도 없는 시행사한테 공사비를 받으라는 건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약속한 16억 원을 이미 지급한 C사도 A사에 B사 주장은 맞지 않다는 내용의 사실 확인서를 써줬다. B사 주장은 '하청업체가 시공한 추가 공사에 대해 발주처로부터 증액을 받지 못했어도 지급한다'고 명시한 하도급 계약서 내용과도 배치된다.
B사는 며칠 뒤 A, B, C사 임원 회의를 열어 추가 공사비를 지급하겠다는 식으로 입장을 바꿨다. 자금이 급했던 임씨는 8월 7일 B사 현장소장을 만나 추가 공사비를 17억 원에서 14억6,900만 원으로 깎기로 하고 정산 협의서까지 작성했다. 하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B사는 A사와 공사 계약을 중단한다는 공문을 보냈다.
C사 전 임원은 "B사가 공사 지연에 따른 손해를 줄이려고 하청업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B사 해명을 듣기 위해 대표를 포함한 관계자들에게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닿지 않았다.
하청업체 "피해자인데 기댈 데 없어"
임씨는 2022년 8월부터 1년 6개월째 추가 공사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서류상 건축주인 신탁사와 발주처인 시행사(C사)에도 문의했지만 책임준공을 맡은 원청사(B사)와 해결하라는 말만 들어야 했다.
A사는 지난해 9월 법무법인의 자문을 얻어 공정거래위원회와 국토교통부 분쟁조정위원회에 하도급 위반 신고서를 냈지만 아직 중간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국토부 분쟁 조정 처리 기간은 60일로 표시돼 있지만 임씨는 "단 한 번도 조사관의 전화를 받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엔 분쟁 난도가 높은 순서대로 사건을 처리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정말 급하면 소송으로 가는 게 더 빠를 수 있다"고 했다. 이러는 사이 B사는 A사가 공사를 잘못해 현장에서 누수로 인한 피해를 봤다며 10억 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업계는 이런 사례가 파다하다고 설명한다. 대한건설정책연구원이 지난해 건설하도급 공정거래 체감도를 조사했더니, 공정거래 체감도 점수는 67.9점으로 1년 전(68.8점)보다 0.9점 하락해 3년 연속 내리막이었다. 특히 계약서 등에 부당한 조건을 내건 부당 특약(64.8점) 점수가 가장 낮았다.
김용우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이 건에 대해 "확약서는 내용상 부당 특약으로 볼 여지가 크지만 사법상 계약이 무조건 무효가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맹점"이라고 지적했다. 결국 공사비를 받으려면 원청 상대 공사대금 청구 소송에서 하청업체가 이겨야 한다.
"누수 보완 공사도 모두 마쳤는데 모든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기고 있어요. 만약 소송에서 이겨도 그때쯤이면 파산해 소송 결과가 아무 소용도 없을 겁니다." 임씨의 한숨이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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