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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범죄피해자에겐… 국가의 지원금도 가난하다

입력
2024.02.05 14:30
수정
2024.02.29 11:07
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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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피해자: ③지원 제도의 문제점]
피해자 지원, 헌법 의무지만 관심 못 받는 주제
국가구조금 기준은 수입... 고소득자가 더 받아
지원금 총액도 미미해 영국의 5% 수준에 그쳐

편집자주

범죄피해자가 겪는 고통은 가해자가 붙잡힌 다음에도 계속됩니다. 범죄는 가족, 건강, 일자리를 앗아간 데 이어 주변의 삶까지 무너뜨렸지만, 유일한 버팀목인 국가의 구조망은 너무 얇고 헐겁습니다. 피해자 보호는 헌법이 정한 국가의 책무지만, 국가는 예산과 인력을 이유로 많은 부분을 민간에 맡긴 채 조금 멀리 비켜서 있습니다. 범죄를 오로지 '피해자'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심층기획을 시작한 한국일보는 가해자 지원 예산에도 미치지 못하는 얄팍한 범죄피해자 지원 제도를 지적하려 합니다.

"타인의 범죄로 생명·신체에 피해를 받은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해 국가로부터 구조를 받을 수 있다."

범죄 피해로 남편을 잃은 A씨가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정다빈 기자

범죄 피해로 남편을 잃은 A씨가 지난해 12월 21일 경기 한 카페에서 한국일보와 인터뷰 중 눈물을 닦고 있다. 정다빈 기자

대한민국 헌법 제30조. 헌법 조문을 좀 읽어봤다는 이들조차, 현행 헌법에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싶게 생소한 조항이다. 범죄피해자가 국가 지원을 받는 일은 무려 '헌법으로 보장받는 권리'지만, 표가 안 되니 정치인들은 크게 여기에 주목하지 않았고 역대 어떤 정부도 만족스러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래서 헌법상 권리임에도 다른 기본권에 비해 정부나 국회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잊혀진 권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나나 당신이나, 우리 모두 '운이 없다면'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 한국에선 한 해 약 150만 건의 범죄가 발생한다. 단순 계산으로도 국민 100명당 3명이 해마다 크고 작은 범죄의 피해자가 된다. 경미한 피해로 끝나는 경우도 많지만, 어떤 범죄는 범인이 잡히고 단죄가 끝난 뒤에도 계속 피해자와 그 가족들의 발목을 붙잡아 빠져나갈 수 없는 좌절의 늪에 가둔다.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는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운 뒤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기도 하지만, 범죄 피해를 당해 목숨을 잃거나 노동력을 상실하면 피해 당사자나 식구들은 남은 일생 내내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기도 한다. 막대한 병원비는 물론이고, 투병·간병으로 인한 기회비용이나 정서적 상실감 등 2차적 피해도 무시할 수 없다.

법무부 관계자가 범죄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법무부 관계자가 범죄피해자 보호법 개정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뉴시스


중상해 구조금, 현실에선 981만 원

이들을 위한 '범죄피해자보호법'이란 게 있기는 하다. 범죄 피해로 인해 장해를 얻거나 중상해를 입은 경우 최고 1억4,567만 원, 사망 피해자의 유족에겐 최고 1억7,481만 원의 범죄피해구조금(이하 구조금)을 지급하도록 한다. 연 1,500만 원에 총 5,000만 원 한도로 치료비도 별도 지급된다.

최고 금액만 놓고 보면 꽤 든든해 보이지만, 현실은 꼭 그렇지도 않다. 피해의 정도, 피해자와의 관계, 심지어 피해자가 받는 월급에 따라 깎이기 때문이다. 범죄 피해를 원인으로 한 다른 손해배상이나, 합의금을 받았을 경우에도 그만큼 구조금이 준다. 실제 2022년 지급된 구조금의 건당 평균 금액은 △유족 구조금 6,091만 원 △장해 구조금 3,573만 원 △중상해 구조금은 981만 원 수준이다. 치료비·생계비 등 경제적 지원은 건당 215만 원에 불과했다. 치료나 트라우마 때문에 일자리를 잃는 피해자들의 현실을 고려할 때 매우 부족한 금액이다.

법무부 내부 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은 담겨 있다. 법무부가 지난해 범죄피해자 지원을 받은 91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들은 범죄 피해 이후 실직(24%)이나 이직(11.3%), 이사(27.7%) 등 삶의 큰 변화를 경험했고, 44.3%는 가장 필요한 서비스로 '경제적 지원'을 꼽았다. "지원금이 부족해 생계 유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거나 "실질적으로 피해를 본 만큼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의견도 많다. 피해자의 원상회복을 도와야 하는 '헌법상 의무'를 지닌 국가가 실제론 피해자 구조에 매우 인색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얄팍한 국가구조망

안 그래도 얄팍한 '국가구조망'은 경제 사정이 어려운 피해자 앞에선 더욱 인색해진다. 유족·장해·중상해 구조금은 모두 '피해자 월급'을 기준으로 책정된다. 피해자 월급에 피해 정도(개월 수 환산)를 곱해 지급하는 형태다. 동일한 범죄 피해를 입었더라도, 피해자 경제 수준에 따라 구조금이 차별적으로 지급되는 것이다.

여기서 더 깎이기도 한다. 구조금 책정에서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피해자의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부양가족'인데, 피해자의 수입이 '0'이라면 '부양가족' 역시 없는 것으로 취급될 수 있다. 배우자 또는 부양가족이 없는 경우, 장해·중상해 구조금은 2분의 1로 줄어든다. 자녀에게 지급되는 유족 구조금도 유족이 피해자에게 생계를 의존하지 않았을 경우 30% 수준으로 깎인다.

결국 정부가 "이런 대책도 마련했습니다"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구조금 최고액은 피해자가 고소득자여야 유리하다. 그런데 가난하다고 해서 범죄 피해의 고통이 덜하겠는가, 아니면 치료비나 생계비가 덜 들겠는가.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한국피해자학회장을 지낸 원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강력범죄 피해를 당하는 이들은 사건 이전부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던 경우가 많다"며 "피해자 소득 손실을 기준으로 구조금을 지급하는 것은 '사회보장'이라는 구조금제도의 취지와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피해 지원 총액, 영국의 5%

한국과 영국의 범죄피해자 보상금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과 영국의 범죄피해자 보상금 비교. 그래픽=강준구 기자

한국 정부의 자린고비 피해자 구조금은 범죄피해자 지원 쪽에서 선진국인 영국과 비교했을 때 더욱 초라하다. 한국 정부가 2022년 범죄피해자들에게 지급한 구조금(약 95억 원)과 경제적 지원(약 32억 원)은 총 127억 원이다. 반면 영국은 한 해(2022년 4월~2023년 3월) 범죄피해자에게 약 2,957억 원(1억7,500만 파운드)을 지급했다. 20배가 넘는 격차다.

제도를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격차의 원인을 알 수 있다. 영국은 친족 제한 규정(가해자와 피해자가 친족 관계일 때 보상금을 제한·감액하는 규정)이 없고 △경찰관의 체포를 돕거나 △범죄를 목격해 정신적 신체적 피해를 입게 된 경우까지 폭넓게 보상한다. 또 생계비 지원(일실소득보상)이나 치료비 지원(특별비용보상) 기간에 한도가 사실상 없다. 범죄 피해로 인해 경제활동을 못하게 된 경우, 사회보장법이 정한 '병가 수당'을 다시 일할 수 있거나 연금 수급 연령(혹은 기대 수명)이 될 때까지 지급한다.

필수 보상금은 피해자의 월 소득과 무관하게 지급된다. 사망 사건 발생 시 유족 위로금이 1명당 5,500파운드(약 929만 원)씩 일괄 지급되며, 미성년 자녀가 있으면 만 18세가 될 때까지의 양육비가 매년 1명당 2,000파운드(338만 원) 지급된다. 남은 가족을 위해 피해자의 예상 병가 수당을 연금 수급 연령 등까지 지급하기도 한다. 상해 보상금은 최고 25만 파운드(약 4억2,250만 원)다. 이들 보상금은 총 50만 파운드(약 8억4,500만 원) 한도 내에서 대부분 중복 수령이 가능하다.

기금 개혁도 검토해야

전문가들은 부실한 구조금의 근본 원인으로 예산 부족을 지목했다. 예산이 부족하니 하위 법령과 실무 단계에서 각종 조건과 제약이 붙어 구조금을 깎으려고만 들고, 결국 범죄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돕기엔 턱없이 적은 지원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한민경 경찰대 교수는 "구조금은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경우 피해자들에게 응당 지급되어야 하는 성격"이라며 "기금이 넉넉하지 않다 보니, 구조금 지급액을 깎아야 할 이유를 찾는 소극적 방식으로 실무가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기금 개혁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구조금은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을 통해 지급된다. 기금은 한해 1,001억 원(2022년 기준) 규모로 편성되지만, 구조금·생계비·치료비 등 피해자에게 직접적으로 혜택이 주어진 직접 사업비는 288억 원(피해자 국선변호사 사업 등 제외)에 불과하다. 대부분이 상담시설·보호시설 운영 유지 등 간접 사업비로 나간다. 원혜욱 교수는 "간접 사업비는 정부 부처의 일반 예산으로 돌리고, 범죄피해자기금은 피해자에게 직접 쓰는 사업비로만 사용하도록 하는 개혁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최동순 기자
최다원 기자
강지수 기자
이유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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