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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년... '페미니스트 외교'는 유럽서 업그레이드 중

입력
2024.02.03 04:3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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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별의 별의별 유럽: 시즌 2]
②확산하는 페미니스트 외교

편집자주

우리가 알아야 할, 알아두면 도움이 될, 알수록 재미있는 유럽의 이야기를 신은별 유럽 특파원이 한 달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케냐의 여성 및 페미니스트들이 지난달 27일 케냐 나이로비 시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해, 이른바 '페미사이드'를 반대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케냐에서 열린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나이로비=AP 연합뉴스

케냐의 여성 및 페미니스트들이 지난달 27일 케냐 나이로비 시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해, 이른바 '페미사이드'를 반대하고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케냐에서 열린 페미사이드 반대 집회로는 사상 최대 규모였다. 나이로비=AP 연합뉴스

"우리는 이제부터 '페미니스트 외교'를 합니다. 여성, 잊혔던 절반의 존재를 찾으려 합니다."

2014년 가을, 마고트 발스트룀 신임 스웨덴 외무부 장관은 이렇게 선언했다. '성 평등을 핵심 가치로 두고 다른 국가와의 관계를 쌓겠다'는 뜻이었다. 스웨덴의 선언으로 '페미니스트 외교정책'(Feminist Foreign Policy·FFP)이 탄생했다.

이후 10년. FFP 몸집은 눈에 띄게 커졌다.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많은 국가가 FFP 추진을 선언했다. 그러나 지지가 늘수록 반발도 커졌다. '남성을 배제하는 외교 전략 아니냐'는 식의 오해 때문이다. 이는 FFP의 길을 튼 스웨덴이 FFP를 최초로 폐기한 원인으로도 작용했다.

스스로 지속가능한 모델이 돼야 '성 평등'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터. 그래서 FFP는 계속 '변신 중'이다. FFP가 걸어온 10년, 그리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스웨덴의 안 린데 전 외무부 장관, 독일 연구조직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센터'(CFFP) 공동창립자 겸 전무이사 니나 버나딩, 독일 싱크탱크 독일외교협회(DGAP) 소속 레오니 스탬 연구원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살펴봤다.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안 린데(왼쪽 사진부터) 전 스웨덴 외무부 장관, 니나 버나딩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센터'(CFFP) 공동창립자 겸 전무이사, 레오니 스탬 독일외교협회(DGAP) 연구원. 유럽안보협력기구 CFFP DGAP 제공

한국일보와 인터뷰한 안 린데(왼쪽 사진부터) 전 스웨덴 외무부 장관, 니나 버나딩 '페미니스트 외교정책센터'(CFFP) 공동창립자 겸 전무이사, 레오니 스탬 독일외교협회(DGAP) 연구원. 유럽안보협력기구 CFFP DGAP 제공


FFP 가는 '거대한 길' 뚫은 스웨덴

FFP는 국제사회에서 주류로 자리 잡았다. 유엔여성기구(UN Women)에 따르면 스웨덴(2014) 캐나다(2017) 프랑스(2019) 멕시코(2020) 스페인·룩셈부르크·독일(2021) 칠레(2022) 등이 FFP를 외교 전략으로 공식화했다. 지난해 9월에는 FFP를 채택한 국가들에 몽골 르완다 튀니지 등이 합류해 총 19개국이 'FFP+ 그룹'을 결성했다. FFP 확산 및 잠재력에 외교적 초점을 맞추겠다고 선언하면서다.

전 세계로 확산했지만 어떤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지, 이를 위해서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일관된 정의나 공통된 합의는 없다. 국가별 성 평등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FFP를 채택한 국가 대부분이 스웨덴을 '교본'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스웨덴 모델은 탄생 10년이 지난 지금도 FFP를 이해하는 기본 틀로 여겨진다.

스웨덴이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을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도입하도록 한 마고트 발스트룀 전 스웨덴 외무부 장관. 유엔 제공

스웨덴이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을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도입하도록 한 마고트 발스트룀 전 스웨덴 외무부 장관. 유엔 제공


스웨덴 FFP의 핵심 목표는 '3R의 평등한 분배'였다. 3R은 권리(Rights), 대표성(Representation), 자원(Resources)을 의미한다. 모든 여성이 자신의 사고·행동을 제한하는 굴레에서 벗어나고(권리), 의사 결정에 참여하거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며(대표성), 구조적 소외나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자원) 하는 데 외교의 방점을 찍은 것이다.

개별 정책은 이를 반영해 짜였다. FFP 도입 후 스웨덴은 공적개발원조(ODA) 등 해외에 자금을 투입할 때 이 돈이 여성의 권리를 증진하는 방식으로 쓰이는지 확인했고, 때로는 성적 억압·폭력을 시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기도 했다. 유엔 등 국제무대에서는 성 평등이 핵심 의제로 자리할 수 있도록 의식적으로 목소리를 냈다. 정부 차원에서 특정 행사에 참여할 때는 패널 성별 구성이 얼마나 균등한지를 기준으로 삼기도 했다.

린데 전 장관은 FFP를 "몰랐던 것을 보게 만드는 렌즈"라고 칭했다. 그는 발스트룀 전 장관에 이어 스웨덴의 FFP를 발전시킨 인물이다. 2014~2022년 스웨덴에서 외무·법무·무역부 장관을 거쳤다. "쉬운 예를 들어볼게요. 한때 스웨덴으로 수입되는 여성복 관세가 남성복보다 최대 6배나 높았습니다. 이런 차별은 '특별한 렌즈'를 끼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스웨덴 밖으로 눈을 돌려도 마찬가지입니다. FFP를 채택하지 않았다면 몰랐거나 혹은 알고도 넘겼을 불평등인데 FFP 덕분에 '우리에겐 고칠 책임이 있다'고 마음먹게 된 겁니다."

스웨덴은 1979년 성별에 따른 노동 차별을 금지하는 법을 도입하는 등 국제사회에서 성 평등을 앞장서 실천한 국가로 분류된다. 그러나 FFP를 통해 더 목표지향적인 정책을 짜게 됐다는 설명이다. 발스트룀 전 장관도 "구호 프로그램 계획, 외교관 고용, 조약 작성 등 모든 것에서 여성을 무시하고, 침묵시키고, 학대하고, 심지어 허용하는 '습관적 관행'을 바꿔야 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지난해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프랑스 등 19개국이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 플러스'(FFP+) 그룹을 결성하며 발표한 선언. 네덜란드 정부 홈페이지

지난해 9월 유엔 총회를 계기로 프랑스 등 19개국이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 플러스'(FFP+) 그룹을 결성하며 발표한 선언. 네덜란드 정부 홈페이지


배제? 선교? FFP에 대한 오해들

긍정적 취지와는 달리 FFP에 대한 비판은 상당하다. 상당수 비판은 오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①적지 않은 이들이 FFP를 '여성 이기주의'로 여겼다. '여성이 마땅히 누렸어야 할 것을 누리게끔 하겠다'는 시도가 '남성을 기존 질서에서 소외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된 탓이다. 시간이 흐르면서는 "여성 권익이 이미 향상했는데 굳이 인위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도 커졌다.

②FFP는 때로 계몽 또는 선교로 해석됐다. '특정 국가가 자국의 우월한 젠더 의식에 기반한 사상과 행동 양식을 상대 국가에 심는 것'으로 해석된 것이다. 덴마크 오르후스대는 2020년 보고서에서 이렇게 지적했다.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은 많은 경우 원조, 개발 지원과 맞물려 진행되기 때문에 받는 쪽의 관점을 존중하지 않는 '신(新)식민주의'로 인식될 수 있다."

③FFP가 강한 안보·패권 질서를 등한시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여성에 대한 강조가 '남성적'으로 여겨지는 군사력 등을 무시한다고 본 것이다. FFP를 연구·전파하는 국제 네트워크인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협업'(FFPC) 최고경영자인 리릭 톰슨 미 조지워싱턴대 엘리엇스쿨(국제관계대학) 겸임교수는 지난해 미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발스트룀 전 장관은 '현실 정치에 무디다'는 비난을 받았다"고 썼다.

④굳이 외교 정책에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를 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근본적인 물음도 나왔다. 논쟁이나 자극을 지양하는 언어 사용이 관례로 여겨지는 외교계에서 굳이 반감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은 용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스웨덴 정부위원회인 '원조 연구 전문가 그룹'(EBA)은 지난해 보고서에서 이렇게 평가했다. "FFP로 인해 성 평등에 대한 정부의 야망이 더 강력하게 나타났고 성 평등에 있어서 스웨덴의 국제적 리더십을 강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페미니즘에 반대하는) 성 보수 세력과의 긴장도 고조시켰다."

세계 여성의 날을 이틀 앞둔 지난해 3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파리=EPA 연합뉴스

세계 여성의 날을 이틀 앞둔 지난해 3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파리=EPA 연합뉴스


지속가능성 고민하며 진화한 FFP

여러 비판과 논쟁에도 많은 국가가 FFP를 채택한 건 성별에 따른 억압·차별 해소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독일 정부 발표에 따르면, 86개 국가에서 여성의 특정 직업 종사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가정폭력이 처벌되지 않는 국가에 사는 여성은 전 세계에 6억 명이나 된다. 버나딩 이사는 "FFP는 권력 계층을 분석하는 강력한 도구이자 모든 사람이 억압에서 자유로워지고 평등해지는 비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FFP를 오해 속에 방치하면 평등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전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 이에 많은 국가들이 FFP가 오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일부 내용을 수정하는 노력을 병행했다.

독일 외무부가 지난해 3월 안날레나 베어복 장관 체제에서 발행한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 가이드라인'.

독일 외무부가 지난해 3월 안날레나 베어복 장관 체제에서 발행한 '페미니스트 외교 정책 가이드라인'.


독일은 FFP의 지속가능성을 가장 치열하게 고민한 국가로 꼽힌다고 스탬 연구원은 말했다. 스웨덴의 3R에 독일이 '다양성'(Diversity)을 추가한 게 대표적이다. "스웨덴이 '모든 여성과 소녀'를 논의의 중심에 뒀다면 독일은 '모든 여성과 소외 계층'을 그 자리에 뒀습니다. 'FFP가 특정 집단을 소외시킨다'는 잘못된 메시지가 아니라 'FFP는 기존 질서에서 배제된 모든 사람을 포용한다'는 메시지를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스탬 연구원에 따르면 독일은 내부 규범, 태도 정비에도 공을 들였다. 성 평등에 대한 내부 합의가 공고해야 외교 정책이 추동력을 얻을 수 있고, 스웨덴에서처럼 정권 교체에 따라 정책이 폐기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독일이 발행한 '페미니스트 외교정책 활동을 위한 가이드라인'에도 "시간제 근무, 육아 휴직 등이 경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지 않도록 보장한다", "조직 스스로 성 불평등에 대한 구조를 식별하지 못할 수 있으니 외부 센터를 통해 문제점을 찾고 시정하도록 한다" 등 내부 규범 관련 내용이 대거 포함돼 있다.

한국일보 인터뷰에 응한 전문가들은 FFP가 앞으로도 확산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평등은 국제사회가 공통으로 추구하는 가치라는 점에서다. 다만 외풍은 계속될 수 있고 FFP의 형태 또한 이 과정에서 계속 바뀔 수 있다. 발스트룀 전 장관은 10년 전부터 그 운명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문제를 추구하려면 용기와 인내가 필요합니다."




베를린= 신은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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