괌 남부 해안 한 바퀴
지난달 17일 영하 13도의 한겨울 아침,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한 겹 더 입어야 하나, 아니 번거로울 거야. 결국 반팔 티셔츠에 가벼운 후드를 걸치고 두꺼운 겨울 점퍼로 무장한 후 집을 나섰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 시린 냉기가 몸속으로 솔솔 파고들었다. 여름옷만 몇 벌 들어간 여행가방 바퀴가 보도블록과 마찰하며 통통 튄다. 헐거움과 가벼움이 얼어가는 손아귀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인천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김포 상공을 돌아 내륙을 통과했다. 차가운 공기는 먼지마저 동결시켜 발아래로 눈 덮인 산하가 하얗게 눈부시다. 그렇게 약 4시간 후 태평양 한가운데 괌에 도착했다. 평균기온 영상 26도에서 30도 사이, 한파를 탈출해 여름에 내려앉았다.
스페인, 일본, 미국… ‘차모로’의 전통은 어디에
괌 앞에 습관적으로 붙는 수식어가 ‘미국령’이다. 북한이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할 때마다 사정거리 기준점으로 언급된다. 인근 사이판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가까운 미국 땅이다. 1950년 미국 자치령으로 공식 편입돼 그 나라의 가장 서쪽 땅이기도 하다. 괌정부관광청 공식 가이드북은 괌에 대해 ‘약 4,000년 전부터 차모로인들이 정착해 생활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미국의 도시와는 다른 고유한 문화와 특별한 전통이 전해 내려온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괌에 원주민의 흔적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약 300년 전 스페인 식민지배 이래 이 섬은 현재까지 외부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수도 하갓냐에 스페인광장이 있다. 괌 정부에서 대표 관광지로 소개하는 곳이다. 오랜 기간 스페인이 괌을 점령하던 시기 총독이 거주하던 곳으로, 야외 음악당인 키오스크를 중심으로 대포가 설치된 무기고와 총독 관저, 사교 장소로 사용되던 초콜릿하우스 등이 몰려 있다. 그러나 건물 페인트는 군데군데 벗겨지고, 담벼락은 조금만 힘을 주면 허물어질 것 같이 허술해 ‘국가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안내가 무색해 보인다. 하기야 원주민 입장에서 보면 애착이나 자긍심을 가지기 어려운 식민지배 유적이다. 각 건물마다 세워진 안내판은 영어를 중심으로 좌우에 스페인어, 일본어로 적혀 있다. 오랜 스페인 식민통치를 거쳐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에 점령당하고, 이후 미국령으로 편입된 이 섬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나마 차모로의 흔적은 광장에서 도로 건너편으로 밀려나 있다. ‘라테스톤(Latte Stone)’ 공원이라 이름 붙인 곳에 원주민의 고대 문화유산인 돌기둥 8개가 조형물처럼 세워져 있다. 라테스톤은 집을 지을 때 기둥을 받치는 초석인데, 그 아래에 뼈나 보석 등을 묻어 죽은 자를 기리는 묘비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스페인광장을 가운데 두고 라테스톤 공원 건너편에는 두꺼운 책장을 펼친 모양의 괌박물관이 자리한다. 출입구 좌우에 세워진 거대한 차모로인 동상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동상과 마주 보고 있다. 1981년 교황 방문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동상은 애초 하루 360도 회전하게 설계됐지만, 현재는 박물관을 보고 고정된 상태다. 교황과 마주 보는 원주민 동상은 환영인지 경계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다. 괌의 모호한 정체성을 보는 듯하다.
이국적이고도 한국적인 괌 남부 해안 투어
괌은 섬 전체가 휴양지다. 리조트와 호텔이 몰려 있는 중서부 투몬비치를 중심으로 느긋하고 나른하게 남국의 정취를 즐기는 곳이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탄성을 자아낼 만한 자극적인 풍광은 없다. 스노클링이나 보트타기 등 해양 레저를 즐기기도 하지만, 얕은 해변으로 밀려드는 잔잔한 파도에 일상의 긴장과 피로를 내려놓기 좋은 곳이다. 한때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높았고 지금은 가족 여행객이 많이 찾는다.
괌은 서울보다 작은 섬이다. 하루쯤 렌터카를 이용해 해안도로를 따라가며 섬의 명소를 두루 섭렵할 수 있다. 한국의 운전면허증으로 차를 빌릴 수 있고, 주행 방향도 같아 제주에서 렌터카를 이용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이름난 관광지는 대부분 무료 주차장을 갖췄고, 명소마다 한국인 관광객이 많아 심리적으로 국내 여행하듯 편하게 다닐 수 있다. 단 차를 빌릴 때 렌터카 업체는 '소지품을 절대 차 안에 두지 말라'고 강조한다. 기본적으로 치안이 좋은 편이지만, 요즘은 도난 사고가 심심찮게 발생한다고 한다. 지난 4일 한국인 관광객이 괴한에게 피습당해 숨진 사건은 워낙 이례적이라 교민 사회는 물론 괌 정부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어디를 여행하든 안전이 최우선이다.
숙소가 밀집한 투몬비치는 괌 관광객이라면 기본적으로 찾는 곳이다. 바깥 바다에서는 서핑을 즐겨도 좋을 정도로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드는데, 거센 물살은 얕은 해변까지 닿지 못한다. 해변 가까운 바다는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잠잠해 거대한 천연수영장이나 마찬가지다. 여행객은 보통 이곳에서 보트를 타거나 물놀이, 공놀이를 즐긴다. 추위에서 탈출한 몸이 녹고 마음까지 한없이 늘어진다. 에메랄드빛 바다는 저녁이 되면 황금빛 오렌지색으로 물든다. 둥글게 휜 투몬만의 끝자락에 신기루처럼 저녁 햇살이 부서진다. 하늘과 바다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여유로움이 번진다.
해변 북쪽 ‘사랑의 절벽’은 토속적이면서도 이국적이다. 스페인 장교와 결혼할 것을 강요한 추장, 이를 거부한 딸과 차모로 청년이 죽음으로 영원한 사랑을 이루고자 했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전해진다. 한 번쯤은 들어봤을 듯한 사랑 이야기에 괌의 특별한 풍경이 펼쳐진다. 112m 수직으로 솟은 해안 절벽에 세워진 전망대에 오르면 멀리 검푸른 투몬만 바다와 발아래 투명한 산호바다가 한꺼번에 조망된다.
별다른 이정표도 없는데 여행객이 잘도 찾아가는 곳이 있으니 바로 ‘에메랄드밸리’다. 이름처럼 거대한 협곡이 아니라 바닷물이 드나드는 소규모 인공 수로인데, 물빛이 유난히 투명해 인증사진 명소로 알려져 있다. 색깔만 보면 풍덩 뛰어들고 싶은데 현지에서는 물뱀이 많으니 절대 수영은 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수로는 바로 인근 화력발전소와 연결된다. 발전소에서 배출되는 냉각수가 물뱀보다 유해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곳이 아니어도 예쁜 바다는 흔하다. 괌 가장 남쪽 메리조 마을은 한가로운 오후의 햇살을 즐기며 쉬어가기 좋은 곳이다. 1910년에 세워진 종탑과 부두를 중심으로 산책로와 공원이 조성돼 있다. 바로 앞 코코스 아일랜드행 배가 출항하는 기다란 선착장은 괌 여행객의 또 다른 인증사진 명소다.
남부 해안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으라면 우마탁 마을과 솔레다드 요새다. 우마탁은 1521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괌에 첫발을 내디딘 곳으로 해변에 마젤란상륙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시멘트로 만든 기념비는 생각보다 작고 소박한데, 비석 좌우에 뿌리 내린 거대한 나무 몇 그루가 오히려 오래된 마을의 역사를 증언하는 듯하다. 어쩌면 낯선 이방인의 도착 장면을 묵묵히 지켜봤을지도 모를 거목이다. 마을 중앙의 산 디오니시오 성당 역시 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건축물이다. 태풍과 지진 등 숱한 자연재해로 무너져 1939년 지금의 모습으로 재건했다고 한다.
마을 왼편 언덕의 솔레다드 요새는 바다가 옴폭하게 파고든 우마탁 마을이 한눈에 조망되는 곳이다. 스페인 범선이나 영국 함대를 보호할 목적으로 1800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일본군이 요새로 사용하기도 했다. 바다 방향으로 놓인 대포와 작은 초소가 지금은 포토존으로 사용되고 있다. 해안 절벽으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요새 축대와 나란한 수평선 위로 피어나는 뭉게구름이 그림 같은 곳이다.
남부해안 투어에서 수영복이 꼭 필요한 이유는 ‘이나라한 천연수영장(Inarajan Natural Pool)’ 때문이다. 화산활동으로 생성된 용암이 거세게 밀려드는 파도를 막아 자연적으로 생겨난 풀장으로, 잔잔한 수영장에 다이빙대까지 설치해 놓았다. 전망 계단에 오르면 검은 해변 암석에 거침없이 파도가 부서지는데, 에메랄드빛 풀장은 딴 세상인 듯 잔잔하기 그지없다.
현지인의 속살 들여다보는 정글투어와 공연
괌은 돌고래투어, 스노클링, 스쿠버다이빙, 패러세일링, 제트스키 등 바다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액티비티가 가능한 섬이다. 괌의 색다른 면모를 보고 싶다면 ‘정글리버 크루즈’를 추천한다. 보트를 타고 괌에서 제일 긴 탈로포포강을 거슬러 올라 차모로 원주민의 문화를 체험하는 관광상품이다.
한국인 가이드가 동승해 야자수가 휘어진 물줄기를 따라 이동하며 게와 물고기 등 강과 더불어 살아가는 동식물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되짚어 나오는 길에는 정글에 꾸민 차모로 전통주택을 둘러보고, 레드라이스와 찐 바나나가 들어간 현지 식사도 맛볼 수 있다.
괌 샌드캐슬에서 열리는 ‘카레라쇼’ 역시 차모로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공연이다. 괌 최초의 멀티미디어 공연으로, 공중 곡예와 파이어댄스에 특수 효과가 더해진다. 제작자 상당수가 '태양의서커스' 참여 멤버라고 한다. 카레라는 현지어로 모험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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