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산재카르텔 단속" 근로복지공단 감사 이후
현장선 산재 판정, 연장 승인 문턱 높아진 분위기
전문가들 "무고한 산재 환자에 피해 가면 안 돼"
대기업 화학회사에서 일하던 김지혜(가명)씨는 2019년 서른일곱 살의 나이에 산업재해 판정을 받았다. 유독물질 노출 등으로 인한 폐암 3기였다. 암은 다음 해 뼈로 전이됐다. 다리를 절뚝거려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서 재활ㆍ항암 치료를 받는 김씨는 현재 폐암 4기다.
'장기요양환자'인 그는 3개월에 한 번씩 근로복지공단에 진료계획서를 제출하고 치료 연장 허가를 받는다. 중증 환자라는 점이 고려돼 보통 이틀이면 진료계획서 승인을 받았는데 상황이 돌변했다. 고용노동부가 “나이롱환자를 가려내겠다”며 근로복지공단 특정감사에 나선 후다.
김씨는 지난 8일 본보와의 통화에서 “지난달 치료계획서를 냈는데, 장기요양환자라 검토가 필요하다며 20일 넘게 승인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치료가 종결될까 봐 무섭고 불안하다”고 했다. 김씨는 “말이 장기요양환자이지 저는 건강이 회복되기 어려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이라며 “저 같은 사람에게서 무엇을 찾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고용부가 최근 ‘산재 카르텔’ 감사에 나서면서 산재 환자가 2차 피해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근로복지공단이 고용부 감사에 압박을 느껴 산재 인정 및 치료 연장을 까다롭게 할 수 있고, 실제 현장에서 그런 분위기가 감지된다는 것이다. 11일 한국일보 취재에 응한 전문가들은 산재 보험료 부정수급 문제를 개선하더라도, 산재 피해자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기는 일은 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고용부는 지난해 11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산재보험기금재정 부실화 특정감사’에 착수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은 “느슨한 산재승인과 요양관리에서 비롯된 ‘산재 카르텔’을 뿌리 뽑겠다”고 했다. 산재 승인과 관리에 광범위한 ‘도덕적 해이’가 있다는 취지다. 노동계에서는 극소수 부정 사례를 부풀려 산재보험을 축소하려 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장기요양환자들은 불안감을 느끼는 분위기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일하다 뇌종양에 걸린 후 그 후유증으로 시각장애, 보행장애 등 장해등급 3등급을 받은 한혜경(46)씨. 최근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검사를 다시 받아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한씨의 어머니 김시녀씨는 “자기공명영상(MRI) 검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제출했더니 이번에는 근골격계, 언어 검사를 추가로 받으라고 했다”며 “우리가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노동ㆍ의학 전문가들도 정책 부작용을 우려했다.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인 류현철 일환경건강센터 이사장은 “고용부가 장기요양 환자를 ‘나이롱환자’ ‘부정 행위자’로 몰면 근로복지공단이나 산하 병원도 치료 연장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현미향 울산산재추방운동연합 사무국장은 “장기요양환자의 치료 기간을 단축하려는 분위기를 체감한다”고 했다.
산재 승인 문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엠코테크놀로지ㆍSK하이닉스에서 유해물질을 다루다가 유방암에 걸린 최윤정(가명ㆍ39)씨는 이달 초 근로복지공단으로부터 ‘산재 신청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김씨를 대리한 이종란 반올림 노무사는 “14년간 야간교대 작업을 한 데다가 유해물질 노출도 컸다"며 “같은 조건에서 7~8년 일한 다른 피해자들은 산재 인정을 받았는데, 고용부 감사 이후 근로복지공단의 판정이 엄격해진 것 같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산재 부정수급을 유발하는 유착적 행위는 적극 단속해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민간 병원에서 효과가 입증되지 않는 비보험 치료를 하거나 △산재를 인정받기 위해 수십 번의 불필요한 검사를 받는 행위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사례다. 다만 극소수 일탈로 전체 산재 환자를 ‘부도덕한 집단’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과잉이라고 짚었다. 현 사무국장은 “국가가 보호해야 할 산재 피해자를 돈을 아낀다고 치료기간을 단축해 쫓아내려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류 이사장은 “산재 환자의 치료와 재활, 직장 복귀 시스템을 개선하는 쪽으로 정책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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