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과 국경' 내놓은 김선민 고려대 교수
조-청 관계사, 정치 아닌 '인삼'으로 해부
조선인-여진족이 벌인 치열한 인삼 쟁탈전
골칫거리 '불법 채삼'은 '킹덤: 아신전' 닮아
"인삼 이어 호랑이 등 환경사 연구 확대할 것"
"인삼 연구자로 참석한 자리에 갔더니 좀 당황해하시더군요. 고려 인삼이 아니라 만주족과 요동 인삼 얘기를 했으니까요. '인삼=우리나라만의 것'이라는 인식이 너무 강한 거죠. 반면에 제 책을 접한 외국 독자들은 '그 시대 인삼은 요즘 시대의 석유 같은 것'이라고 대번에 이해하더군요. 주요 천연자원을 둘러싼 긴장 관계라는 보편적 시각이 필요합니다."
최근 '인삼과 국경'(사계절 발행)을 내놓은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김선민 교수의 설명이다. 박사논문을 발전시켜 2017년 미국에서 출판했고, 이번에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은 조선-청나라 관계를 '인삼'을 통해 조망한 특이한 책이다.
동양사 전공자인 김 교수는 석사 때 중국의 '소금'을 다룬 데 이어 박사 때는 미국 듀크대에서 '인삼'을 파고들었다. 소금, 인삼 등 국가가 독점적으로 관리한 구체적 물건 이야기를 추적하면 기존의 정치외교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누르하치, 홍타이지 ... 그들은 '필사적인 장사꾼'이었다
-모피는 들어봤는데 인삼은 의외다.
"중국은 동북삼보(東北三寶), 즉 만주지역 3가지 보배로 인삼, 모피, 진주를 꼽아요. 전근대 의약품이 드문 시절 '최고의 약재' 인삼은 고려나 조선만의 것이 아닌 모두가 탐낸 천연자원이죠. 중국만 해도 송나라 때 산둥성이 유명했는데 남획과 개간 때문에 만주의 인삼 '요동 인삼'에 주목한 겁니다."
-누르하치가 그렇게 대단한 장사꾼이었나.
"어떤 연구자는 청나라 초기 여진족을 두고 '무장상업세력'이란 표현을 써요. 여진족이라면 잔인한 군인을 떠올리는데 그 무력을 뒷받침하는 게 상업이에요. 누르하치는 만주 일대 인삼을 강력하게 통제해 부를 쌓았고요, 홍타이지도 마찬가지죠. 그가 인조와 주고받은 문서를 보면 가격을 후려치지 않을 테니 시장에 나와라, 저건 품질에 문제가 있더라, 명나라와 거래한 걸 왜 우리와는 거래하지 않느냐 같은 통상·무역에 대한 내용이 많습니다."
불법 인삼 채취 문제로 시끄러웠던 조-청 국경
만주 일대 건주여진은 요동 인삼을 중심으로 한 무역을 토대로 청나라를 만들고 뻗어 나갔다. 그랬기에 채취자와 할당량을 지정하는 등 국부의 원천인 인삼을 엄격히 관리했다. 하지만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는 노릇. 돈 되는 인삼을 노린 불법 채삼(인삼 채취) 문제가 들끓었다.
김 교수는 '혼춘부도통아문당'을 꺼내 보였다. 청나라가 두만강 근처 훈춘에 주둔시킨 국경수비대가 작성한 문건이다. 급할 때면 대충 휘갈겨 쓴 만주어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날것' 그대로의 1차 사료다. 김 교수는 국내 몇 안 되는 만주어 전문가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기록들이 많아요. 인삼을 몰래 캐던 여진족 일행이 조선 군인들과 마주쳐요. 이들은 인삼과 생필품을 주고받는 거래 관계를 만듭니다. 인삼은 돈이 되니까요. 그러다 조선 군인들이 비밀 채삼 아지트를 급습해 여진족을 도끼로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일종의 '도끼 만행 사건'인 셈이죠." 김은희 작가의 넷플릭스 좀비 영화 '킹덤: 아신전'도 조-청 국경지대 인삼과 '생사초'가 주요 모티프다.
해외 학계와 동떨어진 민족주의 감정
이런 사건이 빈발하자 조-청 양국은 봉황성에다 상설법정까지 만든다. 또 국경 획정 작업에 들어간다. 이는 '토문강(두만강)의 위치', '간도의 영유권 문제' 같은 민감한 사안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간도는 우리 땅이 아니다. 김 교수는 조-청 양국의 속셈과 치열한 '밀당'까지 세세히 밝혀 뒀다.
이 문제는 사실 학계엔 익히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1880년대 조선-청 국경회담 관련자료 선역', '1880년대 조선-청 공동감계와 국경회담의 연구'를 들어 보였다. 서울대 김형종 교수가 조-청 양국 간 국경 관련 논의 문서를 모두 번역하고, 또 그것을 분석한 연구서로 2014년, 2018년 각각 출간됐다. 말하자면 총정리까지 끝난 사안인데, 민족감정 때문에 누구도 대놓고 말을 못 할 뿐이다.
김 교수가 2017년 영문판을, 지난해 번역본을 내놓으면서 망설였던 지점이기도 하다. 마크 바잉턴 하버드대 교수가 주도하던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EKP·Early Korea Project)'가 돌연 중단된 게 2015년, 국내 60여 명의 한국학자들이 참여한 '동북아역사지도 사업'이 중단된 것도 2016년이었다. 사이비 역사 쪽에서 학계를 식민사학이라고 맹비난하고 이걸 또 덜컥 받아들였던 박근혜 정부 시절이었으니 괜한 오해나 시비를 사는 게 아닐까 걱정이 안 될 수 없었다.
인삼을 넘어 호랑이와 토지까지... '환경사' 선보이고 싶다
김 교수는 어떻게 보면 사이에 낀 상태다. "2017년 영문판이 나오고 해외 학계에서 가장 많이 받았던 평가 중 하나는 '조-청 관계를 다룬 저술 중에서 조선의 목소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반영했다'는 것이었어요. 그래 봐야 한국에선 그렇게 안 받아들여지겠지, 걱정이 들더군요." 한국의 민족주의와 해외 학계 간 간극이 그렇게나 벌어져 있다. 그럼에도 후회는 없다. "그래도 이 정도의 목소리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용기를 냈습니다."
김 교수는 인삼에서 호랑이, 토지 등의 문제로 연구 주제를 더 넓혀 갈 생각이다. 대의명분으로 포장된 공식 문서 뒤에 놓인 실제 삶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고 봐서다. "환경사적 시각에서 국가의 자연 자원 통제, 국민들의 접근, 경계 지역의 자연 자원을 둘러싼 경쟁과 갈등 같은 문제, 그리고 이 상업적 자산이 정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고 싶어요. 기존의 국제 관계, 대외 관계 중심의 서술에서는 볼 수 없는 얘기들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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