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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때 만든 형법... 땜질 그만하고 전면 재건축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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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후퇴 때 만든 형법... 땜질 그만하고 전면 재건축 합시다"

입력
2024.01.08 04:30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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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안 준비하는 한상훈 형사법학회장]
1953년 제정된 형법체계 그대로 사용중
누더기 형법에 각종 특별법만 더덕더덕
AI시대 준비하려면 법체계 전면 바꿔야

편집자주

1953년. 전쟁이 끝난 해죠. 그 때 온갖 범죄를 다스리는 '형법'도 처음 생겼습니다. 못 살던 나라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 정보화를 거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습니다. 그러나 형법은 조금씩 땜질만 이뤄졌을 뿐 그때 체계 그대로입니다. 바뀌는 세상의 새로운 범죄를 처리하려니 각종 특별법(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만 늘었지요. 사람이 사는 집으로 치자면, 식구 수가 계속 늘고 있는데도 좁은 집을 70년 간 그대로 두고 옆에 가건물만 붙여 미봉책으로 공간만 늘린 거죠. 그 형법, 이제 한 번 제대로 뜯어서 새로 설계해 보자고, 형사법 분야 최고 교수·전문가들이 모인 한국형사법학회가 나섰습니다. 한상훈 회장으로부터 '형법 전면 재건축'에 관한 얘기를 들어봅니다.

한상훈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 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광복관에서 형법 전면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한상훈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이 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광복관에서 형법 전면 개정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김예원 인턴기자


"우리 형법은 한국전쟁이 끝나던 1953년 만들어졌습니다. 빨리 '법률 독립'을 이뤄야 한다는 생각에 1·4 후퇴 때도 형법 제정 작업은 이어갔지요. 그렇게 급하게 형법을 만든 지 71년이 지났습니다. 덕지덕지 부분 개정을 하고 임시변통으로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이제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수선이 아니라 전면 재건축을 해야할 때입니다."

한상훈 신임 한국형사법학회 회장(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2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광복관에서 진행된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형법 통합과 전면개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강조했다. 제정 71년이 지난 형법의 골격을 그대로 둔 채 땜질식 개정과 각종 특별법 입법만 이뤄지다 보니, 체계성은 물론 공정성 측면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 특정범죄가중처벌법,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성폭력범죄처벌등에관한특례법, 아동청소년의성보호에관한법률 등 각종 특별법이 사실상 형법을 대신하고 있는 구조다.

가건물로 가득찬 그 체계만이 문제는 아니다. 한 회장은 시대 자체가 달라지며 기존 형법으론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범죄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1953년에 만들어진 '헌 집'으론 인공지능(AI) 시대 법전의 빈틈을 노린 범죄에 제대로 대응하기 힘들 것이라는 경고도 내놓았다. 새해부터 한국형사법학회를 책임진 한 회장은 학회 차원의 '형법 개정안'을 연내에 완성해 국회에 제출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다음은 한 회장과의 일문일답

-법에 문제가 있다면 그 부분만 개정하면 될 것도 같은데, 전면개정을 강조하는 이유는 뭔가요?

"최근 서울시가 지하철 노선도를 40년 만에 전면 개선했죠. 지하철 처음 만들 땐 몇 개 노선만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무려 23개 노선이 생기다 보니 전체적으로 체계가 뒤틀려 사용하기 힘들다는 이유였어요. 형법의 상황도 이와 비슷하죠. 1953년 제정된 이후 부분 개정과 특별형법 추가 제정만 있었습니다. 너무 복잡해져서 국민은 물론 전문가도 이해하기 어려운 법이 돼 버렸어요."

-법 체계성 부족이 현실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킬 수 있나요?

"특별형법이 계속 생기면서 겹치는 부분이 많아졌어요. 특정 범죄행위에 어떤 법을 적용해 처벌될 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갈려요. 그런데 한국에서 어떤 법을 의율·적용해 기소할지는 검사가 정하지요. 결과적으로 수사기관의 재량권이 넓어지고 자의적인 법 적용의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또 특별형법은 대개 처벌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도입돼 법정형의 상한뿐 아니라 하한까지 높였어요. 그러다 보니 특별법 위반으로 기소됐지만 세게 처벌할 필요가 없는 사건의 경우에는 개별 판사가 양형을 낮추게 되지요. 형사사법체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공평성·공정성이 훼손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법이 오래 되어 생기는 문제도 있을까요?

"최근 증가한 전세사기 사건을 예로 들어보죠. (빌라 전세라는) 특성상 피해자 한 명당 사기금액이 1억~2억 원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은 5억 원 이상의 피해액이 발생한 경우에 적용됩니다. 결국 전세사기는 피해자가 한 명이든 수천 명이든, 총 피해액이 얼마든 일반 형법의 적용을 받아 형량이 최대 15년에 그쳐요. 이처럼 다중을 상대로 한 범죄는 법 제정 당시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입니다. 여러 범죄를 경합범으로 처벌하는 것이 합당한지, 미국처럼 형량을 합산해 처벌하는 게 적절한지도 검토해야 할 문제입니다."

-AI를 활용한 범죄도 고려해야 할까요?

"형법 제정 이후 산업화·민주화·정보화가 차례로 진행됐고, 이제 4차 산업혁명을 지나고 있습니다. 시대가 달라졌죠. 불과 1~2년 뒤면 AI 로봇이 우리 생활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할 수 있어요. 지금 형법은 AI를 이용한 범죄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죠. 예를 들어 기존 형법은 2인 이상이 같이 범죄를 하면, 합동범으로 가중처벌합니다. 그렇다면 AI 로봇과 함께 저지른 범죄는 단독범일까요? 합동범일까요?

이밖에 가상자산이나 메타버스 등 새 기술을 활용한 범죄도 일어날 겁니다. 이런 현상은 범죄 전반에 걸친 것이기 때문에, 몇 개 조문을 추가하거나 특별법을 만드는 것만으론 해결할 수 없습니다. 만약 (형법 체계에 넣지 않고) AI 범죄에 관한 특별법이 생긴다면, 아마 '제2의 형법'이 되어 더 기형적인 법체계가 자리잡게 될 겁니다."

-학회에선 어떤 형법 체계를 논의 중인가요?

"새 형법으로 통합되면 겹치는 범죄나 체계를 정리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우리 형법은 절도를 절도, 야간주거침입절도, 특수절도 등으로 나누고 있죠. 반면 독일 등 대륙법계 국가들은 기본 범죄와 가중할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명시하고 있어요. 절도(기본 범죄)가 있고 △주거 침입 △피해액 △흉기 휴대 등 가중 조건을 함께 두는 거죠. 이런 식으로 형량을 세분화·단계화하면 이해와 적용이 쉽고, 향후 개정을 통해 가중 조건을 넣거나 빼기 편리합니다."

-이전에도 형법 개정이 추진됐으나 국회에서 무산됐습니다. 이번에는 가능할까요?

"지금까지 정부에서 두 차례, 학회에서 두 차례 개정안을 만들었어요. 이번이 4전 5기인 셈이죠. 1990년대부터 형법 개정을 위한 연구가 이어졌기 때문에, 자료나 논의는 상당히 축적돼 있습니다. 지난해 학회 내에 발족한 형법개정연구위원회에선 연구자 50여 명이 분과별 회의 등 작업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결국 여론이 중요해요. 유튜브 방송 등을 통해 형법 전면개정이 국민 생활에 밀접한 일이라는 점을 알리려 합니다. 학회에서 먼저 개정안을 만드는 것도 소통과 홍보 방법 중 하나죠. 문제점이 오랜기간 누적돼 온 만큼 이번에는 더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봅니다."

-형법 개정으로 기대할 수 있는 다른 효과도 있을까요?

"K-팝, K-드라마에서 보듯 한국 문화는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어요. 하지만 문화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법 체계는 아직 수입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죠. 급하게 수입한 법을 아직까지 쓰고 있어요. 가장 기본이 되는 형법을 전면 개정해 법률 인프라를 바꿔야 합니다. 토대가 바뀐다면 언젠가는 법 수입국에서 법 수출국으로, 여러 나라에 'K-법'을 전파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최동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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